'조던 피터슨'의 '열두 가지 인생의 법칙'을 보면 '훈육'에 관해 나온다. 교수는 아이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적당한 훈육과 체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폭력적 체벌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체벌'과 '훈육'은 필수라고 말한다. 사랑을 핑계로 훈육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부모로써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에서 한 줄의 문장만 건질 수 있어도 그 책은 좋은 책이다. '열두 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솔직히 다른 부분은 기억 나질 않는다. 언급한 그 부분이 꽤 충격적이었다.
왜 그런가.
당연한 '본질'을 말해서 그렇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본질에 대한 확신이 덜 할수록 획기적인 방법을 찾는다. 본질을 두고 본질보다 더 빠르고 쉬운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그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 건강한 식습관, 규칙적인 운동,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
좋은 성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과서 위주의 예습 복습, 분명한 목표 의식, 엉덩이를 붙이고 오랫동안 앉아 있을 만한 인내력. 그것이 중요하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검절약, 자기계발을 통한 능력 향상, 좋은 투자처를 향한 꾸준한 장기투자. 그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는 '더 획기적인 방법'을 찾는다. 더 획기적이고 빠르고 쉬운 방법. 그런 것들은 실제로 더 문명화 된 사회를 만들었고 더 고도화 된 기술을 발면하긴 했으나 육아, 건강, 공부 따위에 갖다 붙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계발에 해당하는데, 계발은 지속, 빈번, 반복이라는 꽤 고전적인 방법이 정답일 뿐이다.
'지켜야 할 본질적 핵심'이 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획기적인 방법으로, 혁신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역사'와 '성공 신화들'을 보며 우리는 기존 방법에 회의감을 느낀다.
더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을 찾다보니 본질이 흔들린다. '훈육'과 '체벌'하지말라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자란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 부모는 자책과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가 가질 상처를 무기로 '부모'가 자책하면 그것은 아이에게 좋은 일인가.
솔직히 아이를 키우며 목소리 키우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육아를 해보지 않은 '전문가'들이 혹은 자신의 육아에서도 달성하지 못했던 전문가들이 '부모'들의 죄책감을 유도한다.
혹여라도 목소리가 커진다면 '내가 왜 그랬을까'하며 자책을 한다. 그것은 '보육자'로써 자기 확신이 떨어지는 목소리다. 자기 확신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더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부모는 원칙에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잘못했을 때, 단호한 원칙을 기준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좋은 부모'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다수의 부모가 아이를 방관한다.
사랑과 공감과 이해.
말은 좋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물건을 훔친 아이에게 '우리 아이가 물건을 훔치고 싶었구나.'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차도 위에서 노는 아이에게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있다면 아이를 걷어차서라도 일단 차도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 위급한 상황에 사랑의 눈빛과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필요없다.
김선호 작가의 '늦기 전에 공부 정서를 키워야 합니다'에는 '조던 피터스'와 같은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고로 속이 후련하다. 모두가 알지만 그렇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혀 있다.
솔직히 우리는 신화를 기대한다.
선행학습 없이 '서울대'에 입학한 아이, 스스로 좋은 대학에 입학한 이야기 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국영수 과목에서 1등급 비율이 높은 아이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사교육 참여율도 높다. 선행 비율도 상당하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행학습'을 통해 이미 초등시절에 두각을 나타내고 초등에 두각이 나타난 아이들은 중등, 고등에서 여지없이 더 승승장구한다.
미디어는 꼴등이 1등으로 졸업한 이야기, 사교육 없이 명문대에 입학한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다만 '통계'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현실 데이터와 통계는 이상적인 동화를 부정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과정을 선행한 이들은 이미 차별화된 학습환경을 누린다. 단순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이야기를 누구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로 작가, PD, 프로듀서들은 '팔릴만한 이야기'를 싣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진리란 부정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막대한 '학습량'은 어린시절부터 수반되야 한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에서 중학교부터 스마트폰을 뺏고 성적을 만들어내라는 요구를 가 당황한 요구다.
과도한 욕심은 지양해야 한다. 다만 기본에 충실히 인내심을 가지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의 육아는 다른 동물과 다르다. 육아는 사람을 기르는 일이다. 하나의 인간을 기르기 위해서는 '기를 육' 여섯이 필요하다.
지식과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도덕과 윤리를 심어주는 덕육
건강한 신체를 기르는 체육
풍요로운 정서를 기르는 심육
세상의 아름다움을 탐미할 수 있는 미육
타인과 어울리고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사회육이다.
고로
'공부 안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는 균형적인 육아가 아니다.
육아는 사람을 고르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학문을 기르기 위해 정서를 망쳐서도 안되고, 정서를 기르기 위해 학문을 망쳐서도 안도니다.
균형적인 육아를 위해서는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기르려는 부모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체로 그것은 '요령'이 아니라 쌓이는 하루 하루의 일상, 즉 본질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