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를 읽었다. 그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고양이가 되어 '인간'을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고양이 눈에 보여지는 '인간'은 어떨까. '눈'이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각이 있다. 너와 내가 모두 존재하듯, 그들도 존재한다.
어느 빌런이 우주선을 타고 사람들을 해치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그렇다.
'빌런이 지구를 공격하는 것은 지극히 지구를 위한 일이다.'
인간은 '지구'를 자신과 동일시 한다. 다만 인간은 지구의 대표가 아니다. 실제 '지구 온난화'로 피해를 입는 것은 '지구'가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가장큰 피해를 걱정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따뜻해진 지구에는 많은 생물종이 사라지겠지만, 더 많은 종이 생존할 수도 있다.
장난삼아 개미집을 부수거나 숲에 있는 벌집에 화염방사기로 불태우는 일은 우주 빌런이 지구를 침공한 것만큼이나 개미와 벌에게도 재앙이다.
'저 빌런'은 사실 어쩌면 지구를 지키기 위해 '히어로'와 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예시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인인듯 하지만 인간이 이땅에 들어선 것은 비교적 최근에 가깝다.
농작물을 망치는 '맷돼지'는 2000만년전 부터 존재했다. 기껏해봐야 200만년이 고작되는 '인간'이 '어디 내 땅에 들어와!'라며 총을 쏘는 행위는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다.
소설은 '천년집사'에 관한 소개를 먼저 한다. 천년집사는 전설처럼 내려 오는 이야기다. 천 년에 한번,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고통과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선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고덕은 형사다. 범죄와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다만 우연히 죽어가는 새끼 고양이를 구하려다 고양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소재가 독특했다. '해리포터'를 보면 뱀과 해리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고양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장면과는 꽤 다른 서사다. 이 능력은 고덕을 고양이의 세계로 이끈다. 동시에 고덕은 자신이 평소 보지 못했던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
소설의 장점이라면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은 '본인'이라고 특정한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밖에 살지 못한다. 이 단점은 스스로를 독단적인 인물로 만든다. 다만 소설을 읽을 때, 남성은 여성이 될수도 있고, 여성은 남성이 될수도 있다. 또한 전지적인 시점에서 신이 되기도 하고, 제3의 시선도 갖게 된다.
'지구의 수많은 종'을 대표하는 우주 '빌런'과 '지구파괴'의 주동자 '인간'을 대표 '히어로'의 싸움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 시선의 확장은 이처럼 같은 장면을 보고도 시선을 다르게 만든다.
슈퍼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고 이렇게 살려진 '인간'은 매 세끼마다 새로운 생명을 접시에 올린다. 엄청난 탄소배출을 일으키고 쓰레기를 버리며 더 많은 생명을 취하고 앗아간다.
알을 깨자마자 갓 태어난 병아리의 암수를 분리하여 한 쪽을 분쇄기에 바로 갈아버린다. 다른 한쪽은 얼굴과 엉덩이만 뚫린 장소에 밀어 넣고 알만 낳도록 한다. 그 효용이 끝나면 뜨거운 물에 담궈 털을 뽑고 식물을 담근 끓는 물에 살갖을 데워 찢어먹어 버린다. 이 잔혹성을 간단히 풀기만 해도 사악한 악마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인간의 시점으로 맛있는 요리일뿐이다.
예전에 한 일본인이 '100일 후에 먹히는 돼지'라는 영상을 올린 적 있다. '카루비'라는 한국식 이름을 짓고 100일 간 산책도 하고 애정을 쏟는다. 다만 이 애완 돼지는 100일 뒤에 잡아 먹힐 예정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불과 몇 시간 전, 몇 일 전 혹은 방금 전까지 맛있는 식사 메뉴로 '이름 모를 돼지'를 먹고서 유튜브를 비난했다. '가여운 돼지'를 잡아먹는 야만적인 행위를 즉각 멈추라고 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사랑'을 주고, 이름을 준다는 행위는 '신의 권력'과 같다. 인간의 '사랑'과 '이름'을 부여 받은 돼지는 '죽지 않을 수 있는 정당성'을 일부 부여 받은 것이다. 인간은 어떤 대상은 가엽게 여기고, 어떤 같은 대상은 무심하게 여기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고양이들은 고덕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면서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 천년 집사의 과정이 단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천년 집사는 생명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소설은 단순 판타지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명'이라는 주제는 꽤 복잡하다. 언젠가 TV에서 인간이 '소'와 '돼지'를 먹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익숙해진 관습과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생명'을 경시하는 시선을 얻게 됐다. '돼지'라면 살갖이 썰려서 마트 진열대 위에 놓여 있어야하고 같은 건물에는 귀엽게 생긴 살아 있는 동물이 주인을 기다린다. 인간이 선별적으로 '필요'에 의해 살리고 죽이고 먹이고 사랑한다.
우리의 삶은 어쨌건 어떤 다른 생명을 취한, 그 위에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언제나 '모순'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존엄을 해하며 생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자각을 언제나 해야한다. 제3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