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가 쓴가. 내버려라.
길에 가시덤불이 있느냐. 돌아서 가라.
네가 해야할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것들이 왜 세상에 있는 것이냐고 묻지 말라.
'법륜 스님' 강의에서 물었다. 가족 중 누군가와 갈등을 빚는 상황이었다. 그때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메뚜기 교미하는 것도 신경쓰고, 다람쥐 도토리 줍는 것도 신경 쓰냐고...
왜 자기 문제가 아닌, 온갖 것을 다 문제 삼고 사느냐고 말이다.
이 말은 굉장히 해학적이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문제되지 않을 거의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
아들러의 '과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친동생이건 부모, 형제, 아내, 남편, 자식할 것 없이 사실상 모두 '남'이다.
'남'이라는 것이 굉장히 '냉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은, '명사'에서 '남'이란 '자기 이외의 사람'을 일컫는다.
일단 '나'는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가깝게 지내더라도 모두 객체이며, '나'는 아니다. 즉 '타인의 과제'에 덜 신경을 쓰는 편이 좋다. 자신의 과제만 집중해도 벅차지 않은가.
사실 옳고 그름이란 없다.
한번은 '술'에 빠진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는 심각한 '술중독'이었다. 부부끼리 대화도 소홀해진다. 이때 대부분의 편견으로 '아내의 술중독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춘다.
다만 아내에게 문제는 없다. 아내가 술 좋아하는 남자와 만났다면, 더할 나위없이 두 부부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나. 문제는 '남'의 과제를 간섭하는 것에 있다.
앞서 말한 글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이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다. 그는 로마를 안정적으로 통치했으며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런 그도 항상 자기 성찰과 수양에 몰두했다. 그거 썼던 글을 보다가 문뜩 '법륜스님'과 '아들러'의 말이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보건데 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대부분 '내가 옳다는 관념에 깊게 빠져 있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아... 저럴 수도 있겠다'하고 넘어가는 편이 났다. 온갖 것에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일생을 낭비하는 것은 나에게도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모두 이롭지 않다.
절대비교는 불가능하다. 다만 아우렐리우스를 보면 세종이 떠오른다. '왕', '권력', '힘' 이런 것은 그들의 삶에 주요 의미가 아니였다. 이 두 지도자는 '왕좌'보다 '책'을 선호했으며 검소한 삶을 살았다.
세종은 독실한 불자였다. 조선의 공식적인 국가 이념이 '성리학'이라 이는 꽤 모순되는 철학을 갖고 있는 셈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을 국교로 삼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렇다. 그는 로마 황제로써 스토아 철학을 깊이 신봉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국가다. 이들은 '태양신'을 신봉한다. 황제 스스로가 '신'이며 절대자다. 결국 로마가 원하는 것은 맹목적인 신앙숭배다. 다만 이런 로마의 전통이 아우렐리우스의 철학과 부딪친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전통 종교 의식을 수행했지만, 이성으로 운명에 대한 숭고를 했다. 그가 쓴 '명상록'에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인 '이성(로고스)', '절제', '운명'에 대한 순응이 들어난다. 정확히 로마 국가관과 대립된다. 스토아 학파의 핵심 개념을 신봉하던 아우렐리우스는 세종이 신봉하던 불교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스토아 철학과 불교 철학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며, 이성을 통해 평온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성군을 지지하는 정신적 바탕이 비슷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쩐지 기댈 곳 없는 최고 권력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 호기심이 인다. 그들이 기대는 것은 '신'보다 '이성'에 가깝다. '칸트'는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도구가 '이성'이라면, 이 도구가 완전한지 의심하고 비판해 봐야 한다고 봤다. 그렇게 탄샌한 '순수이성비판'을도 앞서 말한 두 군주의 철학과 선을 같이 한다.
이런 위대한 철학가이자 군주들의 생각을 옅보고 싶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이들이 스스로 다독였던 문장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종의 개인 수양 메모는 보기 힘들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은 '명상록'에 담겨 있다. 그 진정성이 신뢰가 간다.
서점에서 '명상록'을 구매했다. 짧은 문장으로 인용하고 읽어보기만 했지 소유하지 못했던 글이다. 차근차근 그의 글을 곱씹고 소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