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_영화는 이미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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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 하는 청년에게 '법륜 스님'이 물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스크린은 어떤 상태 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흰색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면 거기엔 온갖 장면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겠죠?



"네, 그렇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은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당신은 아버지와 함께 좋은 영화를 한 편 보았을 뿐입니다.



깨달음은 그저 '탁!'하는 순간 스스로로 일어난다. 법륜스님의 '탁! 깨달음의 대화' 중 일부다.



영사기가 스크린에 상을 맺혔다가 사라지게 하는 바가 뇌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뇌는 '상'을 맺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존'이라 착각하도록 만든다.


영사기가 커다란 코끼리를 만든다고 눈앞에 코끼리가 살아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이 맺혀지든 그것은 '관념'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상'을 맺는 것을 좋아한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을 좋아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것을 실존한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발생한다. 물 표면이 보글보글 거리다가 어느 경계부터 뿌연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우리는 어디서부터 물이고 어디서부터 수증기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며 흝어지면 어디서부터가 강물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닷물인지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런 구분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짓는다. 그것은 '상'을 짓는 우리의 습성이 '언표'하는 바와 닮았기 때문이다.



모호한 것을 규정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치는 것에 우리는 도가 텄다. '코끼리'를 보고 '크다'라고 말하거나 '달'을 보고 밝다고 말한다. 다만 '코끼리'는 목성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이 작고, '달'은 태양에 비해서는 하염없이 어둡다.



그러나 대략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 상을 짓는다. 그렇게 자신만의 기준에 맞춰 '크고', '작고', '열등'하고, '못생기고 가난하고, 부유하고를 구분한다.



기준은 없다. 그러니 사실상 그것은 허상과 다름 없다.



버스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까, 같은 사고에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고 혼자만 생존했다면,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운이 나빴다가 좋았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모든 그 본질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어두운 방에 켜진 촛불은 그 주변을 환하게 비추다가 점차 어두워진다. 그러나 어디서부터가 어둠이고 어디서부터가 빛인지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몹시 잘은 단계로 그라데이션되어 있는 하나로 볼 수 있어 그렇다. 우리가 빛과 어둠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애당초 하나의 현상을 '댕강'하고 잘라 둘로 나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라 그저 이름 짓기 나름일 뿐이다.



고로 대부분의 것들은 사피엔스종의 '이름짓기 놀이'의 결과물일 뿐이며 이름이야, 미국에서 다르고 한국에서 다르듯. 다르게 짓고 부르면 그만이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 생각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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