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편함'이 주는 역설에 대하여_편안함의 습격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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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봤을 때, 1월 1일 0시 0분 빅뱅이 일어났다. 9월 2일 경, 태양계가 탄생했고 9월 6일 지구가 만들어졌다. 최초의 생명은 9월 중순에 단세포 형태로 만들어진다. 12월 17일이 되서야 다세포 생명이 탄생하고 12월 25일에 공룡이 등장한다.



12월 30일에는 공룡이 멸종한고 12월 31일 저녁 11시 52분, 그제서야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류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화 된 인류'가 아니다.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9초가 되서야 농경, 문명, 문자, 과학, 인터넷 등을 활용하는 문명화 된 인류가 등장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문명은 아주 찰라의 순간이다.



다시 '인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인류 역사를 100이라고 봤을 때 97에서 99는 구석기시대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인류가 맞이했던 시간의 1에서 3%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회'는 전체를 봤을 때 아주 찰라의 순간이며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니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설명은 '인지혁명'이 관한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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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 '경제', '종교', '국가'를 비롯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대부분의 것은 '인간'이 '상상'을 믿는 능력에서 비롯됐다. 이런 '허구'를 믿는 능력으로 문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이렇다. 직계로 연결된 가족 단위만 믿을 수 있던 '소규모 집단'의 인간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면에서도 '한민족' 혹은 '같은 국가', 같은 신을 믿는 사람으로 묶여 '우리'로 묶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우리는 그런 '허구를 믿는 힘'을 기반으로 사회를 만들었다. 고로 우리 사회의 근간부터 거의 대부분은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 일 뿐이다.


우주에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신용', '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들어 냈을 뿐이다.



'사피엔스'라는 '인류종'의 입장에서 어제 저녁 '워렌 버핏'과 내가 똑같이 '치즈버거'를 먹고 6시간의 수면을 했으며 나머지 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행위로 24시간을 채웠다면 그 외에 통장 잔고나 사회적 지위는 둘 모두에게 없는 바와 다르지 않다.



이런 '허구'를 모두 걷어내고 '인간'이라는 '본질'에 집중해 본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과거'의 인간과 다르고, 얼마나 '부유하거나 빈곤한 인간'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종 내가 누리고 있는 사소한 것을 걷어낸 모습을 생각해 보곤 한다.



가령 마트에서 사온 '스테이크용 고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단순 '상품'으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과 같은 '생산' 활동을 통해 얻은 '먹이'라는 인식을 가져보려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꽤 논리적으로 이상한 모순이 발생한다.



고기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과거 우리 사피엔스는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야 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고 커다란 근육도 없는 사피엔스에게 유일한 '무기'라고 한다면 지구력이었다. 사피엔스는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쫒아가 사냥감이 지치면 그때서야 사냥감을 잡고 도축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덩이 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는 꽤 끊임없는 달리기를 해야 했다.



사냥감을 몰기 위해 우리 대부분은 꽤 전략적인 방식으로 협력을 했어야 했고 비슷한 크기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다른 경쟁자와 경쟁해야 했다. 또한 얻은 '먹이'를 어께에 짊어지고 수십 키로를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면 오늘의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거나 '소파'에 등을 기대어 있다.


수십만년의 진화 과정에서 이처럼 적게 움직이고 많은 칼로리를 얻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 역설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 '근육'에 통증이 생기고 심폐능력의 저하로 인한 여타 다른 질병도 쉽게 걸린다.



본래 다양한 '근육'을 사용하고, '다양한 사고'를 하도록 진화했음에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분업화'로 인해 반복적으로 자신의 '직업적 특성'에 맞는 활동만 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 동물종으로써 우리가 가져야 할 '활동 혹은 행동 범위'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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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의 저자, '마이클 이스터'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편하다고 느끼는 '컴포트존'을 스스로 축소시켜며 살아간다. 즉 점차 우리는 작은 범주 내에서만 '편안하다'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꾸준하게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게 됐을 때 얻게 되는 감정에 '쉽게 '불펴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일상을 벗어나 꽤 다른 선택을 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혹은 일상에서 '구석기 인간'과 같은 활동성을 갖기 위한 적절한 운동을 하거나 '식사조절'도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경제력'이 달라지며 조금더 '편안한 환경'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보통 더 괜찮은 자동차를 사거나 더 편안한 소파를 가질 수도 있고 더 괜찮은 전자기기나 로봇 청소기를 가질 수도 있다. 분명 조금더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용하는 로봇청소기'가 고장나거나 '세탁기'가 고장이나면 몹시 불쾌함을 느낀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컴포트존'을 좁히지 않았더라면 그런 불편함은 '불평'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조금씩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영역을 좁혀간다. 그만큼 언제든 '불편함'을 느낄만한 위험 요소가 많아진다.



고대 인류의 스승들, 예수나 싯다르타는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간을 지나오곤 했다. 이 기간이 더 큰 행복을 주지는 않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 비교군을 만들어 주기는 한다.



개인적으로 삶에서 일부러 찾는 '불편함'이 종종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또한 이러한 불편함을 일부러 종종 찾기도 한다. 이런 불편함은 일부러 찾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오기도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불편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불편함이 혼재되어 있기에 그것을 감내하는 연습을 '상황'과 '스스로'가 번갈아가며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은 사실 이야기 하는 부분이 꽤 방대한 편이라 정확하게 '하나의 주제'로 책의 소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책에 대한 평에 호불호가 강한 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읽어가는 과정에서 꽤 흥미로운 인사이트가 있었다. 고로 2026년이 지나가기 전, 다시 한번 재독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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