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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알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공포를 낳는다

우리는 결국 지구를 위한 답을 찾을 것이다 독후감

by 오인환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공포를 낳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넓혀 공포를 줄이는 것이다. 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며 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어떤 장애를 만날지, 우측과 좌측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틀지 아는 사람에게는 공포나 두려움은 쉽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날씨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물고 비가 오는 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예측 불가했다.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인류의 농업은 큰 발전을 이뤘다. 천문학은 하늘을 먼저 아는 일이었다. '천문학'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몫이 었다. '하늘의 뜻'을 먼저 아는 이들은 즉, 하늘과도 같은 권력을 가졌다. 먼저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르는 이들보다 두려움이 적으며 모르는 이들로부터의 권력이 생기는 일이다. 5월이 되면 극심히 가물어가는 날씨보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의 날씨를 더 두려워 했다. 가뭄이 극에 달하는 5~6월에 국가는 '기우제'를 지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억수와 같은 비가 쏟아졌다. 국가는 권력 유지가 가능했다. 우리나라 연간 강수량 중 60%가 쏟아지는 6~9월에 쏟아진다. 국가가 지내는 기우제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어두운 밤에 불을 끄고 걸어가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건, 대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000톤짜리 배가 물 위를 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1톤도 되지 않는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건, '초능력'이라고 부른다. 400톤이 넘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1톤이 되지 않는 사람이 하늘을 나는 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것을 마주하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걸' 알고 있느냐 이다. 앎고 앎지 못함은 비록 그것의 크기와 규모가 대단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미래와 가장 근접한 연관이 있는 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회와 경제를 비롯해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환경문제'다. 요즘처럼 환경문제가 이슈화된 적도 없었다. 10~20년 전까지 환경 문제란 '과학잡지'에서 다루는 공상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지구온난화와 식수부족문제, 식량부족문제의 글은 '정치', '경제'와 맞닿아 있기 보다는 'SF영화'나 소설에 맞닿아 있다.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환경에 관한 이슈를 접하곤 한다. 친환경 산업 기업에 큰 투자를 하고 국가 정책도 환경이 크게 좌우하곤 한다.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공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여러 주장과 생각이 대립되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의 중요한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조금씩 무지의 영역이 걷혀간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것에 관심을 갖고 '앎'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권력'을 갖는다.



최근 읽었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라는 책과 '2050거주불능지구'는 완전히 대립된 주장을 갖고 있다. 이 둘 중 내가 환경에 갖는 입장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고학의 과학자들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를 내가 결론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분명한 한쪽에 열렬하진 않다. 과학자로서 정치, 경제, 사회의 견해를 모두 차치하고 이야기한다. 과학이란 객관적일 거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단정 짓지 않는다.' 어떤 오류로든, 언제든 틀릴 여지가 있다는 가정을 항상 열어 놓는다. 어린 시절 봤던 뉴스기상일보에서 캐스터는 '내일은 비가 올 예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요새는 "강수확률이 70%정도로 예상됩니다."로 수정됐다. 태풍의 경로 또한 콩알만한 점에서 시작해 원뿔모양으로 커져간다. 이는 실제 태풍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범위가 넓어진다는 확률을 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언제든 자기 모순을 인정할 자세가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환경에 대한 입장은 외골수가 되선 안된다. 양쪽의 주장을 모두 듣고 '판단'이 아닌 '앎'이 더 중요하다.



산업혁명 이후에 하키스틱 모양의 그래프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평균을 오고가는 그래프가 산업혁명 이후 하키스틱의 모서리처럼 급격하게 상승하는 모양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통계와 숫자가 말하는 거짓말이 정치에 주로 쓰이는 것처럼 이 그래프는 많은 이들을 선동했다.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떠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소비와 생산 과정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환경을 이해'라는 틀을 넘어 '도덕적 관념'으로도 옳지 못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인류는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상대성 이론이나 타임머신에 집중했지만, 이 영화는 '잃어버린 환경'과 '무책임한 인간'을 더 깊이있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다, 쓰다버린 일회용품처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는가를 반성해야한다. 혹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일회용으로 생각하고 쓰고 버리고 있진 않은가. 환경의 문제가 조금 더 괜찮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인류가 바꿔야 하는 건, 석유를 얼마나 사용하는가나, 고기를 얼마나 먹느냐가 아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가 갖고 있는 '도덕'의 문제로 생각해 봐야한다. 통계를 살펴보니, 환경피해에 우리가 가해하는 부분이 적으니, 지금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자는 것은 인간다운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래로 10배가 많은 인구를 만들어 냈다. 1900년에는 전 세계 인구가 16억에 불과했다. 16억이면 현재 중국인수와 같다. 인간 한 명이 나고 자라며 일생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다. 2050년에 인류는 100억 인구수를 돌파한다. 인류가 만들어내는 앞으로의 인구 대다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극빈곤 계층이다. 이들은 앞으로 인류가 개발하게 될 '그린 에너지'나 '비싼 친환경 상품'과 무관한 계층들이다. 그들은 석탄을 태우고 값싼 플라스틱을 사용할 것이며 배기가스배출이 많은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다닐 것이다. 극수만의 친환경 산업이 앞으로 탄생할 20억에게 무슨 의미를 줄 것인가.



사실상 인구와 탄소배출 그래프가 비례하고 이에 따라 지구의 기온 변화 또한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을 '인권문제'에 엮으면서도 동시에 환경을 걱정한다.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인권과 환경의 문제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선으로, 혹은 악으로 택해야 할지 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환경을 선택하면 인권탄압이 되고 인권을 생각하면 환경오염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환경 문제가 '정치'와 '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 인류는 아직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물은 99도까지 끓지 않는다. 99도에서 1도만 높아져도 끓기 시작한다. 그리고 끓은 후에는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기 시작한다. 단, 1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은 상대적이다. 단순한 1도는 액체를 기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범위가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남은 온도가 1,2도라는 과학 잡지의 이야기를 무한 신뢰할 수 없다. 상당히 많은 변수와 복합적 사안들로 그 시기는 더 빠르거나 늦을 수 있다. 1도의 변화가 당장 내일이 되거나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 액체가 기체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지금껏 겪었던 것들과 다른 상황을 겪게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역사에서 과학을 만나며 세상에 대한 오만한 자세를 갖게 됐다.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착각' 그것이 그렇다. 가령 '불을 얼리는 법'이나 '얼음으로 종이를 태우는 법'처럼 세상에는 정답이 존재할리 없는 문제들도 상당히 많다. 우리가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답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는 가차 없이 내려쳐질 오답의 회초리를 담담하게 맞이하는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오던 우리를 위해 변해보자'에 가깝다. 우리는 모르는 사안에 더 큰 두려움을 갖는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아는 것이다. 알기 위해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세를 살피며 지금과는 다르게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다운 해결책을 얻기 위해선 '지구를 위해서'라는 타이틀이 아닌 '인간을 위해서'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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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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