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_철학 1: 책 사는 데는 돈 아끼지 말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데르 푸쉬킨
가끔, 남보다 예전의 내가 더 낯설게 느껴질도 있다. 스물세 살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저 시를 그다지 공감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스물세 살. 타양살이의 외로움에 지쳐 있었던 것일까? 나의 수첩 앞 장은 내가 수첩을 바꿀 때마다 저 시를 써두곤 했다. 저 시가 그다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의 마음을 대신 이야기해 준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럼 이토록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공감이 될 저 시를 나는 왜 스물세 살부터 기록하고 있었을까.
가끔은 이유가 없이 그냥 감성적이 여지는 날들이 있다. 분명 낮까지는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해가지고 나면 급격한 번아웃에 빠지고 마는지. 그래서 예전 유럽인들은 달이 뜨면 정신병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lunar(달의)'의 'lunatic(미치광이)'을 같은 단어로 차용하고 썼는가 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 어두워졌다. 저녁에 쓸 감정을 낯 동안 모두 쏟아 쓴 모양이다. 아이들과 정신없이 주말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야 겨우 전쟁을 마무리 지은 느낌이다.
이번 주말은 아이들과 '콩순이 키즈 카페'를 방문한 날이다. 본 내용은 다음번에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어쨌건 제주에서는 특별한 외출이라고 할 것이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존재하던 곳이다. 간신히 인구 밀집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선 차를 타고 최소 40분은 달려야 한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서야 이런 키즈 카페를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행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아이들은 아직 혼자서 놀기는 힘든 듯하다. 기본 시간 2시간 내내 나는 다른 부모들처럼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놓고 유튜브를 쳐다보는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겨우 도착하고 나면 아이들과 내내 붙어 있으면서 놀이를 한다.
아이들과 노는 것은 생각을 내려놓고 모든 현재에만 집중하는 일이다. 어쩌면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현실을 살라'는 가르침을 아이들이 가르쳐 주고 있는 샘이다. 나의 아이들이자 스승을 곁에 두고 돌이켜 볼 사진과 영상들, 일기들, 무언가를 연상시키거나, 떠오르게 하는 책들을 핸드폰과 함께 책가방에 잔뜩 집어넣는다. 다른 세계로 혼자만 떠나려는 아버지를 아이들은 놔두지 않는다. 결국 핸드폰이며 책이며 거의 들여다보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한다. 바보 같다는 것은 그렇다. 그저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았다면, 나조차 즐기고 올 수 있는 나들이를 겨우, 몇 글자, 영상 몇 개 챙겨보려고 하다 보니 아이들의 부름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장동선 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웃으며 하는 그에게서 삶의 걸쭉한 점도가 느껴지는 철학적인 이야기가 하나 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 나질 않지만, 인터넷에 간단한 서핑을 해서 그가 말한 대목이 검색에 걸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그저 스치고 지나갔나 보다.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그렇다. 그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국에 온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그가 한국을 선택한 것에 있어 그는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가정'과 '커리어' 모두를 갖는 것은 없다.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과감하게 찢어 버릴 각오를 해라"
우리는 어설프게 걸쳐 있는 것들에 대해 모두 다 만족할 만한 성공을 가지려고 욕심부리기 때문에 번뇌를 갖고 산다. 좋은 아버지이냐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사업가이냐의 질문에서 스티브 잡슨은 과감하게 전자를 버렸을 것이다. 물론, 양 측을 모두 가진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하나를 위해선 하나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좋은 운동선수는 자신의 인생의 '꽃'인 나이에 과감하게 스스로를 불태운다. 연애며 여행이며, 맛있는 음식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동과 훈련에 전념해야 좋은 결과를 갖는다. 멋진 사업가는 스스로 정한 어느 정도 철학의 원칙 내에서 가정적인 아버지가 되지만, 인생 전체적으로 과감하게 가정을 포기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뜨거운 감자를 먹으려면 입을 데거나 뱉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입을 데이지 않고 그것을 삼키는 방법은 없다. 만약 두 가지를 다 욕심내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런 선택을 통해 따르는 스스로의 번뇌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사회적인 위치와 가정에서의 위치 중 어느 하나를 명확하게 선택하지 못했다. 따라서 항상 뒤따르는 번뇌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중 하나를 무참히 포기하고 짓밟고 짓이겨 찢어버린다면, 다른 하나에 쏟아낼 에너지는 탄력을 받을 것이다. 알고 있다. 둘 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결될 것이다. 알고 있다. 둘 다 잘한다는 것은 왼손으로 햄릿을 쓰면서 오른손으로 모나리자를 그리겠다는 욕심이다.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모두가 엉망이 된다. 그도 아니면 정신없지만, 스스로 갖고 있는 양쪽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두 작품을 모두 완성해도, 그 둘이 모두 실패가 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음 가짐을 항상 가슴 한편에 두고 있어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과 잘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열심히 했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 왼손이 그린 햄릿이 엉망이고 오른손이 그린 모나리자도 엉망일 것이란 건 열심히 했다는 것과 관계없이 받아들여야 할 결과일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나를 보며 '아빠가 도대체 해준 게 뭔데?!!'를 외칠 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가 아니라 "미안하다. 해준 게 없구나"라는 마음이 진실로 나올 정도로 스스로 마음공부해야 한다.
나의 역할은 자라나는 새싹의 가지 위치와 길이까지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육아가 아니라 참견일 뿐이다. 돋아나는 새싹이 가지를 돋아내고 열매를 키워내는 일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저 토양에 좋은 비료나 거름을 보태줄 뿐이다. 어떻게 자라나는지는 '신'과 '새싹'의 몫이며 나의 몫이 아니다. 잘못된 아이가 된다고 해도 '잘못된 아이'라는 편견은 내가 만들어낸 정답에 닮지 않은 아이일 뿐이다. 자연에는 '잘못'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돌'은 '돌'대로 그저 존재하고, '물'은 '물'대로 그저 존재한다. 다만 깔끔하게 치워진 고급 호텔 요리 위에 '돌'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이고, 말끔한 고급 소가죽 소파 위에 '물'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법칙이 아니라, 호텔 지배인이 만들어낸 법칙이고 자신의 비즈니스 프로핏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한 일종이 이기적인 '룰'일뿐이다. 멋대로 자라난 나무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며 과감하게 쳐내지는 부잣집 정원의 나무들처럼 누가 규정하느냐에 따라 잘못이 정해질 뿐이다. 그걸 규정하는 건, 내 몫이 아니다. 신이 자연스럽다고 규정한 일을 내가 잘못됐다 규정하는 건, 내가 누구보다 위라는 자만일 뿐이다.
아이들과 제주 롯데마트를 방문했다. 이것저것 많은 장난감을 구경했지만, 결국 책을 사주었다. 책을 좋아하고 말고는 아이들의 몫이지만, 나는 거름을 뿌리고 비료를 채워주는 내 몫을 할 뿐이다. 아이들이 주로 머물던 공간을 슬금슬금 옮겨 책 근처로 갔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샘플 책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한참을 구경하다가 6만 원짜리 동요가 흘러나오는 책을 한 권 씩 샀다. 내 인생 철칙 제1번 '책 사는 돈을 결코 아끼지 말자.' 나에게만 적용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갖고 싶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고민 없이 두 개를 골랐다. 요즘 부쩍이나 하율이와 다율이 가 책에 관심이 많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면, 아버지인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공감이 많아진다. 함께 서점을 다닐 수도 있고, 함께 도서관을 다닐 수도 있으며 서로 읽은 책 내용을 나눌 수도 있다.
아이에게 '학업'이나 '성적' 따위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나중에 아이가 무슨 선택을 하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그 어떤 일을 해도 좋다. 그 판단의 기준을 아이들이 '책'에서 배웠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욕심이다. 아이들의 책이 더럽다. 처음에는 비싼 돈 주고 산 책을 색연필로 낙서하고 반으로 접고 모서리를 찢고 하는 일에 '책을 소중히 해야지!!'하고 야단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책은 책을 보는 사람이 이용한 일이다.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아버지가 책을 자유롭게 건들지 못하게 한다면, 책은 시시한 장식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책에 낙서도 하고 스티커도 붙이고 심지어 접거나 찢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과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규칙을 벗어난다. 다율이 가 좋아하는 늑대와 아기 염소 일곱 마리를 읽어줄 때, 처음에는 제대로 된 내용을 읽어줬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늑대는 나쁜 동물이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그래서 몇 번을 읽어준 뒤에 내용을 바꾸었다. 늑대가 염소의 집에 놀러 갔는데 아기 염소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늑대가 슬퍼했다는 식으로 읽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갑자기 불쌍한 늑대라며 늑대를 위로해주었다. 아이들의 생각이 말랑 말랑하다.
오늘은 차를 탔다. 차의 앞유리에 거미가 붙어 있었다. 하율이 다율이가 소리를 쳤다. 무서운 거미가 나타났다고 호들갑들이다. '이쁜 거미야.', '거미는 우리 친구야'라고 일러주었다. 아이들은 유리창 뒤편에 있는 거미를 손가락으로 스르륵 만지면서 '미안해. 거미야. 우리 친구 하자. 이쁘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갖는 편견의 대부분이 어디선가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낸 편견인 경우가 많은 듯했다. 나는 아이들이 살 세상을 '피해야 할 대상 덩어리'로 채 우두고 싶지 않다. 이쪽 면으로 보고 저쪽 면으로 보고 양 쪽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오늘 꼭 이런 주제로 글을 써야지 한 건 없었는데 이런저런 글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결론은 '책'으로 끝났다. 어쨌거나 겨우 아이들을 재운 후의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