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상처뿐인 관계를 떠나지 못한다면...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인생팔고(人生八苦) 중, '원증회고(怨憎會苦)'. 불교에는 사람이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여덟가지 고통을 구분했다. 그중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수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고통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애별리고)과 고통의 크기는 같다. 원수와 함께 해야하는 고통. 그것은 크나 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관계를 맺는다.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의 얽힘은 확장된다. 게중 선택 밖의 관계도 존재한다. '가족'이 그렇다. 부모, 형제, 자녀와 같이 선택하지 않은 관계. 천륜으로 이어진 관계. 벗어나지 못하는 관계가 그렇다. 관계에서 상처 받길 계속한다면 자신과 상대를 위해 떠남을 결정해야 한다. '이별'을 조금 더 순화된 말로 하자면 '독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부모자식 간의 이별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계에는 '부모자식의 관계'가 지속적이지 않다. 자녀가 성체가 되면 이들은 이별한다. 다름 표현으로 독립한다. 부모의 밥그릇을 탐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이빨을 드러낸다. 그것은 반댓쪽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예외다. 사회가 묶어 놓은 시스템은 '자연계'의 그것을 거스른다. 공자는 유교의 개념에서 '효사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부모를 공경하고 궁휼히 여기는 이 사상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국가와 사회에 부담이 되는 '노인'에 대한 책임을 시스템을 통해 '개인'의 윤리적 책임으로 두었다. 이것을 부정하는 일은 사회에 지탄을 받는다. 유교의 영향력과 무관한 서구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성인 이후로 달라진다. 서양 부모에게 육아의 최종 목적은 '독립'이다. 동양에서는 다르다. 동양에서 관계는 죽음 직전까지 이어진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이 시스템은 다음 자녀가 자신을 공경한다는 믿음으로 지탱된다. 시대가 달라지며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자녀세대가 태어났다. 흔히 MZ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삶의 무게에서 '적어도' 하나의 부담은 줄이고 싶어한다. 이 세대간의 간극 덕분에 현대는 세대간의 갈등이 극심하다.
가족 간의 관계 뿐만 아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관계도 떠날 수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옳지만 그 실수가 자신과 상대의 본질마저 흔들 정도라면 과감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라면을 끓은 양은냄비의 손잡이를 잡는다. 젖은 행주로 쥐어도 뜨끈함이 올라온다면 손에 화상을 입더라도 끝까지 들고 있거나 내려 놓아야 한다. 내려 놓았을 때, 더 큰 부상의 위험이 있다면 손이 데일 각오를 해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최대한 빨리 내려 놓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실수를 떠안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선택을 번복한다. 친구와의 관계나 사제 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신의 실수를 담담하게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이 나에게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저 서로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살펴 봐야한다. 가끔 살다보면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범인들은 가장 쉽고 이기적인 방식을 택한다. 바로 상대를 바꾸는 일이다. 부부는 대게 살아 온 환경이 다르다. 누군가는 머리를 말린 수건을 방 안에 걸어 두길 원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세탁기에 넣어두길 원한다. 상대에게 한 두번 말을 해도 상대가 바뀌지 않는다. 세탁기에 넣어두길 원하는 쪽은 상대를 바꾸고자 노력하고 상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갈등은 대부분 하나 둘 쌓이고 결국 다툼이 된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답은 쉽다.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면 된다. 상대를 바꾸는 것은 흔히 말하는 성인들도 이루지 못했다. '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4대 성인의 제자 중에는 그들을 배반하거나 실망시키는 일이 적잖았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그들도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가 그들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문제 해결 방식을 바꿨다. 그들은 상대를 바꾸지 않고 자신을 바꿨다.
따져 들자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오른쪽으로 가려는 자와 왼쪽으로 가려는 자가 동등하게 힘의 균형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대립이라고 부른다. 대립된 상태에서는 모두가 제자리에서 힘을 소진한다. 오른쪽이던, 왼족이던 사실상 '재앙'에 가까운 결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가 상대의 방향에 맞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상대에게 고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잣니이 고치면 그만이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다. 고로 누군가와 대립관계에 있다면 상대에게서만 문제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한 여자는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 남편은 워낙 술을 좋아했고 여자는 그것이 못마땅하다. 여자가 술을 먹지 말길 남편에게 말해도 남편은 어느정도 약속을 지키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온다. 이 갈등에 여자도, 남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관점을 바꿔 여자가 '술을 먹기로 한다면' 갈등은 사라진다. 남녀는 서로 좋아하는 취미를 갖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금연' 또한 마찬가지다. 담배 냄새가 심하다면 상대가 끊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흡연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흡연은 좋지 않기에 자신과 상대를 위해 금연을 권유하겠지만, 흡연으로 인한 건강의 문제와 부부관계의 악화 중 차악을 택하면 된다. 물론 억지 일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그런 선택을 쉽게 하기 어려운 것처럼 상대 또한 자신을 바꾸는 것을 어렵다고 느낀다.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상대에게 맞추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관계를 종료하는 것이다.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다. 한 번 이어진 인연이 불가분의 인연이 되어 영원히 따라 올 것이라는 관념은 쌀농사를 짓던 전체주의 동양사회에서 있던 문제다. 한, 중, 일 삼국의 자살률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이것은 국가 법이나 사회체계의 문제라기보다 윤리로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윤리와 비윤리. 그것은 분명 살아가는데 중요하지만, 죽음보다 선행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