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이드카
“칵테일 하나 추천해 줘요. 오늘은 영 못 고르겠네. 그리고 시원한 물 한잔 더 부탁해요.”
혜진이 브랜디와 오렌지 리큐어, 레몬주스를 섞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설탕을 한 꼬집 집어 잔 가장자리를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또 다른 깨끗한 유리잔에는 다시 얼음을 가득 채워 맑고 투명한 물을 따랐다.
“칵테일과 시원한 물 한잔 나왔습니다.”
병민은 반짝이는 칵테일 잔과 찰랑거리는 물 잔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렌지 향이 코 끝을 스치며 그의 긴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혜진은 잠시 생긴 틈으로 몸을 돌려 턴테이블의 음반을 바꿨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를 골라냈다. 부드러운 트럼펫 선율은 항상 혜진의 마음의 짐을 내려주곤 했다. 음반을 바꿔 올려놓고 눈으로 오레오를 찾았다.
오레오는 오늘도 자주 오기 시작한 새 단골이 맘에 드는지, ‘벽에 붙은 테이블’ 늘 같은 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다가가 친한 척을 했다. 혜진은 몇 번의 눈인사 끝에 쓸쓸한 눈빛의 키 큰 남자 손님이 상현이란 걸 알게 되었다. 상현은 “달잔”이 가장 적막한 시간을 아는 듯 조용한 시간을 즐기다 갔다. 종종 주머니에는 오레오의 간식과 장난감이 담겨 있었다.
오뎅꼬치를 바라보며 궁둥이를 씰룩대는 오레오의 옆구리가 통통하게 접혔다. 오레오의 두툼한 뱃살이 혜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래도 간식은 좀 줄여야겠지?’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새끼고양이를 참 잘도 키웠다고 생각했다. 혜진은 오레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 쓰레기봉투 위에 버리고 갈 수 있는 것인가. 혜진의 품에서 인공분유를 먹고 자란 오레오는 이제 혜진의 가장 든든한 동업자가 되었다. 혜진은 상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맥주 하나 더 드려요? 오늘도 식사 안 하고 오셨죠?”
상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빈 잔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오늘은 다들 왜 이렇게 빈 속으로 들 오셨데.’
혜진은 혼잣말을 삼키며 오레오의 밥그릇을 채워 넣고 상현의 맥주를 챙겼다. 분주히 움직이던 혜진은 병민이 슬며시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술과 함께 약이라니,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혜진은 말없이 마른행주로 테이블만 닦았다.
병민은 약기운이 돌길 바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30년 간의 직장생활은 그에게 인내심과 노련함을 함께 주었다. 실력도 있었고 운도 따랐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부장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땐 커다란 파도처럼 성취감이 몰아쳤다. 승진이란 건 인사발령이 나고 정신없이 축하 인사를 받을 때까지만 행복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타박할 법도 한데 병민에겐 실제로 그랬다.
부서의 최고, 부서장이라는 리더십의 정점에 오르자 그에 눈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들어왔다. 피라미드 구조에서 각 단계마다 누락된 구성원들. 어떤 이들은 나이와 연차가 차도 오르지 못하고, 오를 의지가 없기도 했다. 그의 경쟁자들은 떠나거나 남아서 그의 목에 칼날을 겨눴다. 신생아를 안아 들 듯 신입사원도 여럿 받아왔다. 그 모든 상황을 비빔밥 비비듯 아울러 완성도 높은 음식을 내야 하는 세프가 되는 것, 그것이 부장으로서 그의 역할이었다. 그 와중 눈에 띄는 한 구성원이 최근 부서의 빌런으로 화려하게 활약 중이었다.
부서원들은 그 빌런이 오랜 시간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이 누락되며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라 말했다. 병민도 처음엔 노처녀 히스테리가 곁들여진 불만표시 정도로 여겼다. 승진도 결혼도 피상적으로는 거래였고 거래가 불발되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느냐, 납득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병민은 더 이상 무엇이 빌런을 탄생하게 하였는지 고민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처음에 그녀는 직속 상사와 잦은 다툼을 일으키는 걸로 서막을 알렸다. 그런데 다툼의 이유가 업무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왜 키보드 소리를 크게 내어 자신의 집중력을 방해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더니 불현듯 등을 마주하고 자리한 타 부서의 남자직원 둘을 스토킹으로 인사부에 신고했다. 자신을 자꾸 흘끔거리고 업무와 관계되지 않은 메신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통로에 나온 의자를 치워달라 했던 게 전부라 했다. 억울한 가해자들 중 한 명이 울분을 못 참고 사무실에서 욕을 섞어 고성방가를 했다.
“이 미친년아, 누가 너한테 반했다는 거야?”
여러 동물의 자손들이 줄줄이 호출되어 왔다. 병민은 그녀를 대신해 대외적으로 고개를 숙이러 다니느라 더 바빠졌다. 병민은 그녀를 불러서 다그치기도 해 보고 달래도 보았다. 그럴 때면 빌런은 순한 양처럼 아무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최악의 피날레는 업무 태만에 근무시간조차 지키지 않고 퇴근하려는 그녀를 병민이 막아서 던 날 일어났다. 열심히 일하는 다른 부서원들 사기 꺽지 말고 퇴근 시간은 지켜달라는 병민에게 그녀는 카메라를 들이대며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몸에 손대는 거냐는 질문과 함께. 병민은 빌런을 막아서지 못했다.
닷컴 버블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의연하게 잘 견뎌냈던 그였다. 임기를 2년 앞두고 노련하다 생각했던 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밤이고 낮이고 심장이 두근거렸고 시도 때도 없이 등골이 오싹했다. 밤마다 시간을 헤아리며 잠들지 못했다. 원인 모를 이명에 시달린 것도 수개월 째였다. 견디다 못해 병민은 정신과를 찾아가 공황장애 진단과 함께 약을 받아왔던 것이다.
앞에 잔 두 개만 응시하며 말없이 앉은 병민에게 혜진이 가만히 말을 걸었다.
“저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병민도 대꾸했다.
“그러시죠.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서로 하나씩 물어봅시다.”
혜진이 조심스레 입에서 맴도는 말을 끌어올렸다.
“아까 약을 드시는 것 같던데, 술과 함께 복용하셔도 되는 건가요? 술장사 하는 사람이 물을 말은 아니죠?”
살짝 어색해하며 혜진이 웃었다. 병민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 듯 팔다리를 가볍게 내려놓고 웃었다.
“술과 함께 먹어도 되는 약입니다. 썩 좋진 않겠지만요. 걱정해 줘서 고맙네요”
혜진은 자연스럽게 작은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걱정했거든요. 그럼 저에게 물으실 질문이란 건…?”
“이 칵테일 이름이 무엇인가요? 참 마음에 드네요. 이름을 알아야 다음에 또 주문하죠.”
익숙하면서도 낯선 질문에 혜진의 눈동자가 더 깊고 동그래졌다. 가늘고 긴 눈을 깜빡거리며 혜진이 대답했다.
“사이드카. 사이드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