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표류기 : 홍콩편 EP9
매일 같은 동작으로 손목에 향수를 뿌리곤 합니다.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인데, 손목에 1번 칙- 뿌리고 두 손목을 포개었다가 턱뼈 부근에 톡 얹고 잠시 숨을 들이쉬며 오늘도 좋은 하루, 라고 중얼거리고 집을 나섭니다. 이렇게 매일 같은 동작으로 같은 향수를 뿌리는데도 단 하루도 똑같은 향이 난 적이 없었지요. 향수는 개봉 시점부터 향이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날씨 때문에, 때로는 체온, 혹은 제 기분에 따라 다른 향이 되며 매일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랑수아. 이번 여행길에 다 비우고 버리고 오리라 챙겨온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향수입니다. 그냥 눈에 띄어서 가방에 넣은 것뿐인데, 그 우연이 도시의 풍경을 향기에 담아주어 더욱 뜻깊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밤이 찾아오자 도시의 불빛이 모두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귓가에는 에드 시런의 목소리가, 눈앞에는 홍콩의 밤이, 뺨에는 차가운 항구의 바람이 스쳤죠. 도심 한가운데 멈춰 서서, 제이피 모건 타워와 IFC 타워 앞에서 고개를 들어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건물은 반짝반짝. 밤하늘의 비행기 불빛도 반짝반짝. 모든 것이 빛나는 도시가 그렇게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네요.
며칠 뒤면 저도 저 불빛 중 하나, 높은 빌딩 속 수많은 창문의 불빛처럼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반짝이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순간 그대로 모든 걸 바라보는 여행자로 서 있습니다. 한때는 이런 건물들이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길을 돌아보니, 레이저쇼를 뽐내는 마천루보다 다른 것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완탕면 집의 황금빛 국물 냄새, 캠퍼스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새까맣게 빛나던 눈동자,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 숙소에서 한 거품 목욕... 향수병이 비워질수록 채워지는 건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황혼이 물든 빅토리아 하버를 따라 걸으며 어둠을 맞이한 순간이 가장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주황빛 하늘이 잔잔한 물결 위에 번지고 페리들이 하버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그림 같았죠. 그랑수아의 달콤하고 묵직한 향과 함께 홍콩의 황혼도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 작은 향수병에 남은 한 방울을 손목에 뿌렸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향수처럼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매 순간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변해가지만, 그 변화가 우리만의 유일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처럼요.
텅 빈 향수병을 쓰레기통에 툭- 버리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호텔을 나섰습니다. 그랑수아는 '빅토리아 하버의 황혼'이라는 이름의 추억으로 남기로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 발자국 하나하나에 이 도시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