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전반적인 감상:
시간은 벌써 거의 10년이 흘렀는데 이 책이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슬프고 아픈 사건들은 뭘 해도 슬프고 아프겠지만 그래도 애도는 있어야 한다. 이 시집은 자의든 아니든 세상에 의해 서로에게 타자화되는 우리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전할 수 있는 하나의 애도다. 그리고 또한 문학이 대중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시는 전혀 어렵지 않고 쉽다. 누구나 이해할 만하다. 강력 추천. 근데 어쨌든 휴지는 지참하고 읽으세요.
1.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했었는지. 내가 직접 사서 선물해 준 것만 열 권은 넘을 것이다. 당시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모두 선물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기형도 이전에 나는 이 댓글시인을 알았다. 두 시인의 시는 그 주제나 형식에 있어서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르지만, 내게 ‘이런 시를 쓰고 싶다’하는 감상을 진하게 남겼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사랑스럽다. (시 내용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최애 시집”의 그 “애”도 결국 사랑한다는 뜻 아닌가.)
그런 시집이지만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거의 6-7년은 된 것 같다. 이미 많이 읽었으니 다른 책도 좀 보자, 하는 핑계에 이사 때의 실수가 겹쳐 책장 가장 구석에 누워 있던 것을 다른 책을 찾다 우연히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책을 집어들었고, 중학교 시절 느꼈던 그 감상이 이번의 독서로 많이 바뀌지는 않기를 바라며 펼쳤다. 내 마음에 아직은 여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소중했던 것들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고 서문부터 울컥해서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렸다. 10년 전이라고 해도 그놈이 그놈이다. 아끼는 감성이 어디 갈 리 있나. 이 책이 이제 내게 더 이상 “좋은 책”이 아니게 되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은 접어두고 편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리고 읽는 내 더 아프고 더 따가운 생각들을 하며 몇 편마다 휴지를 좀 뜯었다.
2.
책이 나온 지 거의 10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세상에는 한숨 쉴 일이 많다. 시인이 애도해야 했던 사건은 지금도 예사롭게 일어난다. 단지 피해자의 이름만 바뀔 뿐이다. 문학이 시작된 이래로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겠답시고 또 수없이 많은 책들을 냈는데도 세상은 아직도 요지경이다. 심지어는 전보다 더 퇴보한 것 같은 순간들도 있다. 시인은 서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희망을 확인한다는데, 내게는 아직 서러움과 한탄만이 잦다.
기사와 시가 함께 실려 있고,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예외적으로 3부는 기사 없이 시만 적혀 있지만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지 알 수 있는 작품들이 꽤 있다. 몇 부가 제일 좋았다,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기사와 함께 읽을 때 정서가 극대화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장에서는 시를 보기도 전에 기사만 봐도 울컥해 마음을 가다듬고 시를 읽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울컥울컥하는 게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쌓아온 경험치만큼 시 하나를 보고도 떠오르는 사건들이 많아서인 것 같다. 안타까움은 누적된다고 바래지도 않는 모양이다.
꼭 사람에 대한 시나 슬픈 시만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의 작품 범주가 넓다는 건 독자로서는 좋은 일이다. 어쨌든 읽을 게 많다는 뜻이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시로 엮어낼 수 있는 시인의 공감능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3.
타인의 사정을 허락 없이 문학적 소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문학계에는 있어 왔다. 그러나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는 그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대상을 그저 위로하고 싶은 마음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작품 내적인 요소들을 이야기하자면, 시 자체는 상당히 직관적이고 쉬운 편이다. 비유가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생뚱맞은 것은 없다. 원관념을 생각하면 자연히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나 그 중에서도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탁월한 것들을 서로 연결해 놓았다. 사람들은 어렵고 난해해야 제대로 된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유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단어도 이 작품들에서는 가슴이 선득해질만큼 아프고 시리게 느껴진다. 시의 구조와 전반에 깔린 정서가 시어 하나 하나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것은 시인의 능력이 훌륭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쉬운 전개 방식이나 비유와는 별개로 가아아끔 모르는 단어가 있기는 했다. (그래 물론 내 어휘력의 문제겠지만. 근데 요즘 신작로, 개활지 이런 단어는 잘 안 쓰지 않나? …….)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도 좋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동안 서러웠을 테니 이제는 제일 좋아하는 책들만 모아둔 칸에 곱게 모셔두어야지. 그리고 세상 풍파에 감성이 무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또는 종종, 또는 자주 펼쳐봐야지.
[좋았던 시 몇 편]
부활
어찌 됐건
생을 마친 종이를 부활의 초입까지 나르는 일은
늙은이들의 몫이 되었다
언덕을 오르던 정오
말보로 상자는 납작해진 주둥이로
브라질 숲에서 왔노라 자랑을 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작에 고향을 잊은 노인은
의심스러운 저울에 무거운 시선을 보태느라
눈이 시렸다
영락없는 푼돈이지만
당분간 목숨은 그럭저럭 붙은 셈이다
장차 자신의 장례비를 외투에 넣고 돌아선 그는
곤궁한 처지를 푸념하는 대신
그깟 외로움 하나 견디지 못한
아들놈의 죽음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은 부활하지 않는가, 하고
*한파 속 폐지 수집 노인
독박 씌우기
칼에 베이고도
더는 딱지 지지 않는 생살 몇 덩이가
치지직, 불판 위에서 탔다
이모님과 유통업자는 이문을 남겼고
도축업자와 옛 주인도 이문을 남겼다
우리 또한 삶의 노고에 대한 얼마간의 보상을
(엉뚱하게도)
너에게 청구하기로 했다
회식의 취지대로
웃고 떠들며 회포를 푸는 동안
문득 너도
도축장으로 실려 가던 그저께
고속도로 트럭 밖의 생경한 외계 풍경을
기왕에 소풍 삼아 즐겼기를 바라나
사실 우리는 그런 식의 소풍을 떠나지 않는다
미안하다만 우리는 돈을 치렀고
이모님은 이문을 남겼고
오롯이 너만 당했다
*도축 직전의 소 · 돼지 “제발 기절하게 해주세요”
필연을 믿으며
세상이 생겨나던 날
우주 양쪽 끝에서
서로를 향해
바늘 한 쌍이 출발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허공에서 바늘 끝은
맞부딪힐 것이고
당신은 불꽃에 데일 것만을
염려하면 됩니다.
우리, 확률 같은 얘기는
하지 맙시다
*딱 한 번 만난 남자를 14년째 찾아 헤매는 여자
작은 가마우지에게
달콤한 케이크
톡 쏘는 샴페인
아직은 얼굴을 알 수 없는 아무개의 청혼에
또박또박 화답하고
긴 호흡으로 입 맞출 수 있게 된
작은 가마우지 앞날에 축복을
*인공기도 이식받은 두 살 소녀를 위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