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선, <황홀한 숲>
전반적인 감상:
시인 특유의 조금은 엉뚱하고(해설의 표현을 빌렸다) 뜬금 없는 것 같은, 그러나 강렬한 알레고리는 어떤 시에서는 빛을 발하고 어떤 시에서는 내게 딱히 울림을 주지 못했다. 아쉬운 점은 “옛날 시”라는 티가 좀 많이 난다는 것. 감안하고 본다면 좋은 시들이 많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고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시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담은 시집이라는데 시 혹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고찰이 깊었다(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마음에 들었던 시 몇 편]
토마토
고래 한 마리 입 벌리고 날아다닌다
간신히 몸을 굽혀 들어간다
거울이 깨져 있다
바람이 불려나
빛이 흔들린다
어두운 어머니 환한 미소 앞에
애꾸눈 아버지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다
바람이 불려나 꽃이 진다
노란 스커트 밑에 새 알이 있다
바다는 왜 철사줄을 닮았나
늙은 고래 한 마리
사막에 누워 푸른 고등어 토한다
하늘 가득 고래가 날아다닌다
구두를 찾아서
하루는 옷을 사러 맨발로 여관에 갔다
주인이 비가 오니 배를 사라고 한다
향나무를 하나 달라 하니
성냥이 불이 안 붙는다며
꽃무늬 우산을 주었다
때맞춰 바람이 부니
촛불을 켜야 하기에
바로 옆 레코드 가게에 갔다
어여쁜 주인은 이제 노래는 없다고
태극기 걸면서 옷을 벗는다
바로 옆 의사가 달려와
법댈 해야 한다며 총을 쏘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화장 짙은 주인이
연극은 비싼 만큼 재미있었다고 숨을 거둔다
바로 옆 교회에서 가발 쓴 스님이 합장하며
이것도 인연이라며 증인이 될 터이니
양심껏 시주하라 한다
나는 무섭고 우스워
바로 옆 동물원 맹수사에 숨어 일 년을 살았다
손을 씻다
샘터에 쪼그려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아가미 들석이는 붕어 배 가른다
모든 힘은 집중이 필요하다
손아귀에 움켜쥐고 지그시 누른다
지문이 남지 않을 줄 알기에
가시와 가시 사이로 키워 오던
누렇게 뭉친 깨알 같은 기다림도
둥둥 뜬 투명한 희망도
그저 단순하게 가볍게 긁어낸다
형식은 내용의 껍데기일 분
붕어는 애원 섞인 울음도 없다
압력은 온몸으로 느끼겠지
때론 가느다란 떨림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동정을 잃을 때의 느낌이 이럴 줄 몰라
그리고 손톱 등으로
체온을 지키던 비늘을 훑어낸다
물론 국화 꽃잎처럼 피는 없다
그 순간에도 아가미는 호흡한다
살아 있음이 호흡을 전제로 한다면
마지막은 언제나 떨리는 걸까
머리 잘린 붕어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붕어의 투명한 눈꺼풀이 감겨 있다
권태
불을 만든 고양이가
시간에 찔려 죽으니
쭈글쭈글한 노파
자리에 앉아 새점을 보고
그 앞에
아주 작은 칼 가는 곱추
존재는 의식 너머에 있다 (중 일부 발췌)
내가 죽이려 한 의사는 다운 증후군은 얼굴 모습이 비슷하고 손바닥이 두 겹으로 접힐 만큼 특징적이며 정신 연령도 비슷하다고 원인은 염색체 이상이지만 이런 기형아의 발생은 神을 믿게끔 하는 주원인이 될 거라고
1.
쉬운 시와 난해한 시가 섞여 있다. 쉬운 것은 아주 쉽고 어려운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동떨어진 시어들을 자주 붙여 사용하기에 그런 것 같다. 어떤 시에서는 그 부자연스러움, 또는 불협화음이라고 할 수 있을 조합이 좋았고, 어떤 시에서는 그저 그랬다.
2.
이 시집에 대한 평가보다 내 평소 시 취향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시각적으로 형상화가 되는 시, 비참함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시, 온전히 직설적이지도 온전히 알레고리만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은 시.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 시집은, …… 음. 전반적으로는 썩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해변의 묘지(폴 발레리)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3.
자주 등장하는 시어는 이런 것들이다: 거울, 물고기, 권태, 새, 뱀, 애벌레.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별개로 창녀 화대 수음 발정 젖가슴 이런 표현 좀 시집에서 그만 보고 싶다. “옛날” 시니까 이해해야지 싶으면서도 불쾌함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요즘 것”이라 이런 감상도 이해받고 싶다.
4.
진짜 꼭 그런 비유가 아니면 안 되는 원관념을 담았는데 내가 미처 눈치챌 능력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남의 글이니 이렇게 말할 권리가 없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표현 몇 개가 시집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을 망쳐 버리는 게 아쉽기는 하다. 그런 것치고 마음에 드는 시를 꽤 많이 뽑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매력(?)을 다 담고 있는 시집이니 읽어 보면 누군가에게는 울림이 클 수도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