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전반적인 감상:
읽기가 아주 괴로운 책이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보며 그저 불쾌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와 이 지하인이 어느 한 지점에서는 닮은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더 많은 괴로운 고민이 찾아온다. 대체 이 인간은 왜 이러는가. 이런 인간은 왜 만들어지는가. 이런 인간과 나는 왜 닮은 지점이 있는가. 결말에서 그 질문들에 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싱겁게 끝난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하는 고민들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은 틀림없다. (썩 유쾌한 성장은 아닐 테지만.) 작품 내적으로는, 광기를 탁월하게 잘 묘사해낸 책이다. 민음사의 번역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1.
도입부가 ‘나는 아픈 인간이다’라니. 보통 이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란 죄다 어딘가 아픈 인간들일 것이 뻔한데, 시작부터 굳이 이렇게 선언을 하고 들어가는 걸 보면 내면 상태가 정말로 심상치 않은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스스로가 아픈 인간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즉 병식이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치료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1부는 전체가 다 독백조로 진행되어서 무엇이 사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전부 자기보고적 진술일 뿐이니까. 그래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어투나 태도에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라는 화자의 고백은 사실인 듯하다. 소심하고 생각이 많고 자기비하가 몸에 익어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증오한다.
여러분은 분명 내가 여러분을 웃기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할 텐가?
- 13p.
조금 찔렸다. 왜냐하면 진짜로 화자가 웃기다(부정적인 의미로)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2.
어투 자체는 상당시 변화무쌍한데, 만물에 시니컬하다가도 돌연 비장해지고 결연해진다. 화자가 스스로를 ‘아픈 인간’이라고 정의해 첫 문장부터 내 뇌리에 때려 박아준 바, 나는 화자의 이런 연극적 어투와 광기 어린 사상을 읽으며 이 인간을 도대체 ‘어떤 환자군으로 분류해야 하는가’를 내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3.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단은 포기했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어떤 진단명 하나에 화자를 편입시키기가 어려운 탓이기도 했고, 또 책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진단명을 붙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을 한 번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나면, 그 사람을 해당 카테고리의 특성으로만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화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최소한 하나 정도는 있을 텐데, 그런 지점들이 ‘어떤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 따위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서인 것 같다.
다만 추론을 해보자면 과도한 인정욕구와, 반복된 좌절에 의해 비롯된 세상에 대한 냉소 정도로 화자의 심리를 정리해볼 수 있겠다.
4.
화자는 자신의 ‘이성’이나 ‘사상’에 대한 확신이 과도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유한 혹은 탁월한 사상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화자 역시 그 사상을 타인에게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타인은 비웃음 혹은 경멸로 화자의 진지함 혹은 현학적인 태도를 끊임없이 부정한다. 이러한 좌절 경험이 누적된 화자는 그 고결한 생각들을 세상을 애초에 이해할 능력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문학 작품 속 인물이니까 한 번 멋대로 분석을 좀 해 봤다. 실제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으니 걱정 않아도 된다.)
사실 화자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즉 사회생활 경험이 좀 있는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비웃음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많아서 고립된 것인지 고립되었기에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화자를 보며 먹지 못하는 포도가 신포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자에게는 세상 그 자체가 신포도인 것이다.
5.
우리가 최소한 하나의 지점에서는 화자에 공감할 수 있을 적이라고 앞에서 적었는데, 그 사실 자체로 좀 불유쾌하고 괴로운 일이다. 화자는 사람은 전혀 호감이 갈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왜 이 책이 기존 소설의 문법을 배반했다고 평가받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보통 주인공이라 함은 어느 하나는 ‘본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존재여야 할 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주인공과 닮은 점이 있다는 사실에 짜증만 느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하다가 안 되면 ‘어차피 저건 별로야’하고 대상을 매도해 버리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모순 외에도 나는 화자의 타인에 대한 통제욕에 대한 부분에서 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글을 적으면서도 썩 내키지 않는 고백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화자가 학창 시절의 어떤 친구나 리자에게 그러한 것처럼 타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모욕하고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해야 하다니.)
다만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극도로 피곤하다. 또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을 피곤해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틀리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6.
자신과 결이 다른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편이다. 그래서 인간관계 자체를 자주 피하는데, “대체 뭐 하러?”하는 회피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생각이 그러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충분히 인간관계를 잘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부 말미에서 화자가 리자를 찾으러 나설 때조차 “하지만 대체 뭐 하러?”하는 독백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가짐을 좀 고쳐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정말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사람을 앞에 두고도 “하지만 대체 뭐 하러?” 따위의 생각을 하다 포기하게 될까 봐 순간 두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미 그런 식으로 포기한 인간관계가 한둘 있다.
다행히 내게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의 노력 덕이라기보다는 상대의 노력 덕이다. 나는 화자와 같은 지하인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 (그에 대한 동정과는 별개로.) 진짜 진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다. 어쩌면 현실성이 있는 가정 같아서 더 절박하다. 사람과의 접촉을 제발 차단하지 말고 어떤 인간 군상이든 경험해 보기. 이 책의 약발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가기를 바라 본다.
7.
사람에게 가장 큰 자극은 사람이다. 그 자극을 등한시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되다 보면 화자와 같은 ‘지하인’이 되거나 혹은 안하무인 자아도취인이 될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둘이 비슷한 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생기는가’에 대해 사회의 문제라거나 개인의 문제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주장하지는 않겠다. 둘 중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 없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도 하지 않겠다. 사람이 모이면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타인으로부터의 일체의 부정적 경험이 없는 사회란 바꿔 말해서 모두가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화자와 같은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덜 괴롭게 만들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엇일지는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다. 원인이야 ‘둘 다’라고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의 기질을 바꿀 수는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회를 바꾸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대체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에 대해서는 지금 현 시국만 봐도 알 수 있든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어도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비록 독자를 불쾌하게 하고 공격하는 책이지만 아주 가치가 있다. (책에서 주제나 문제를 찾으려는 강박을 버리는 중인데 쉽지 않다.)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집단에게 어떤 문제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책과 같은 경종이 끊임없이 울려야 한다. 어쨌든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다수가 ‘지하인’의 특성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에는 동감할 테니.
개인적으로 화자를 알았다면 물론 병원을 권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개인으로서 이런 괴로움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그것뿐이다. 모든 지하인과 지하인의 주변인들에게 부디 안녕이 찾아가기를.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에 괴로움은 없고 안녕만이 있다면 그 모든 위대한 사상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텐데? 고통에서만 사상이 탄생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어쨌든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이 혹은 우리가 겪을 고통이 그렇게 막 추잡한 것은 아니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