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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 희곡선

<뒤렌마트 희곡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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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부인의 방문’과 ‘물리학자들’이라는 두 편의 희곡 모음집이다. 이번달만 해도 두 번째로 희곡을 도전하고 있다. 내 평생 읽은 희곡이 열이 채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그 중 둘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읽었던 <인형의 집>이 나에게 희곡에 대한 편견을 일부 없애주었기에, 이번 도전은 그래도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희곡에 대한 나의 편견(어렵고 재미없다)을 완전히 깨부숴 주었다. 나는 문학에 대한 평가가 좀 박한 편이다. 그래서 평생 읽은 책 중 5점(5점 만점에)을 준 책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뒤렌마트 희곡선 중 ‘노부인의 방문’은 기꺼이 5점을 주고 싶은 작품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한 대사를 쓸데없이(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말하는 이 극문학 특유의 낭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왕 솔직해진 김에 하나만 더 말하겠다. 나는 여전히 ‘노부인의 방문’이 희곡이라서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좋은 이야기이기에 좋은 것이고, 만약 희곡의 형식을 띈 게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하고 있었더라면 5점 만점에 5점이 아니라 10점을 주었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에서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하기 전 쓰여 있는 해설 부분을 보면 뒤렌마트가 쓴 소설을 간절하게 읽고 싶어진다. (어쩌면 지금 극작가에 대한 모욕……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죄송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독자도 순수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 아닌가.)

그러나 희곡의 대사와 지문만으로 이루어진 형식에도 이제는 조오오오오금 익숙해진 것 같다.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대사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시장: 자하나시안 여사. 우리는 아직 유럽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귈렌 시의 이름으로 여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인간성의 이름으로 거절합니다. 손에 피를 묻히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살겠습니다.

- 54p.
처음에는 신앙이니 인간성이니 운운하던 시장과 그에 동조하던 사람들은 결국 자하나시안 여사가 제시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의 유혹에 못 이겨 일을 죽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위 대사를 읊을 때와 똑같이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위선이란.

2.

첫 등장부터 자하나시안 여사(노부인)는 나이 들고 돈 많은 여성으로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행보를 많이 보여준다. 물론 가진 돈과 권력에서 오는 오만함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것은 여느 부자들과 같지만, 여사가 내뱉는 많은 대사는 단지 시니컬하다는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만큼 의미심장하고, 그 속에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뒤틀린 유머가 숨어 있다. (그래서 여사의 대사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오싹하다는 느낌도 든다.)

3.

여사의 모든 말은 복선이 된다. 초반부의 여사의 입에서 나온 복선들이 후반부에 다른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회수되는지는…… 아, 정말 이 작품을 꼭 읽어 보시기를 바란다. 드라마 더 글로리 급의 도파민을 선사해 준다.

배경이 되는 도시 귈렌은 여사의 고향이다. 그리고 현재(극의 배경상) 거의 쫄딱 망했다. 그래서 시장이며 교장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 돈 많은 노부인의 방문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여사가 적선이나 좀 해주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여사는 실제로 귈렌에 지원을 약속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여사의 옛 연인이자, 여사를 배신했던 ‘일’을 죽이는 것. 여사는 그것을 정의라고 말한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일’은 여사를 임신시키고도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부인해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여사는 창녀가 되어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참한 과거를 극복하고 이제는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한 여자의 복수극, 그러나 뒷맛이 좀 찝찝한’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주인공은 이 딜레마적인 제안을 받은 시민들이 될 줄 알았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기로에 선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고뇌하지 않는다. (적어도 작품에서 그 고뇌를 많이 다루지 않는다.)

교장: 정신이 번쩍 드는군. (비틀거리며 일에게 다가간다.) 당신 말이 옳소. 전적으로. 당신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소. 이제 나는 당신에게 한마디 해야겠소, 알프레드 일 씨, 원칙이라 할 만한 말을요. (일 앞에 꼿꼿이 선다. 아직 약간은 몸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일 거요.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당신 역시 이미 오래전에 알았고. 귈렌 사람치고 그걸 인정하려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유혹은 너무 크고, 우리의 가난은 너무 혹독하오.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소. 나도 그 일에 가담할 거란 사실이오. 서서히 살인자로 변해 가는 나 자신이 느껴지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힘이 없어요. 그걸 알기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두렵소, 일 씨. 당신이 그랬듯 두려워요. 아직은 압니다. 우리에게도 한 번은 저런 노부인이 오게 되겠지요. 언젠가는 말이오. 그러면 지금 당신이 겪는 일을 우리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곧, 아마도 두세 시간만 지나도 나는 그런 사실을 망각하게 될 거요. (침묵.) 슈타인헤거 한 병 더.

- 115-116p.
부당한 욕구나 유혹에 저항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다. 누구나 그저 삶이 편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 ‘양심’ 혹은 ‘인간성’이라는 것이 왜 숭고한 것으로 받들어져 왔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들은 무지하다. 그저 돈 많은 노부인이 이 도시에 왔으니 이제 살림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여기저기 외상을 낸다. 그들의 호경기를 위해서는 ‘일’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딱히 ‘일’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는 않는다. 그냥 ‘10억을 제시받았다’는 그 사실만을 보고, 자신들 중 누군가가 일을 죽여야만 그 돈이 실제로 수중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마구 빚을 내고 그동안 참아왔던 가난에 설욕이라도 하듯 삶을 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지어 ‘일’의 가족들마저도 빚을 내 형편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기 시작한다.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사는 맛’을 좀 낼수록 ‘일’은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딱히 터무니 없는 공포감은 아니다. 실제로 시민들이 내는 빚이 커질 수록, 그들은 ‘일’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될 테니까.

작품은 ‘일’의 공포감을 세세하게 묘사해 드러낸다. 주인공을 뽑으라면 ‘일’이 될 것이다. 그 지점이 내게는 신선했다. ‘일’은 일단 악인으로 규정된, 처단받아야 할 (그게 노부인이 제시한 것처럼 사적인 제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그가 부정의한 일을 저질렀음은 틀림 없다.) 인물이고, 그의 평가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일: 시장! 나는 지옥을 겪었소. 당신들의 빚이 쌓여 가는 것을 보았지. 좋아진 생활 형편을 확인하는 매 순간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느껴썽. 당신들이 이런 두려움, 이런 오싹한 공포를 주지만 않았어도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요. 우린 다른 식으로 담파을 지을 수도 있었을 테고, 내가 총을 집어들지도 몰랐을 일이오. 당신들을 위해서 말이오. 하지만 나는 집에 틀어박혀서 그 공포심을 이겨 냈소. 혼자서 말이오. 힘들었지만 이제 해냈소. 되돌릴 일은 없소. 당신들은 이제 나를 심판해야 하오. 당신들의 판결이 어떻든 나는 거기에 복종할 거요. 그것이 내겐 정의니까요. 당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소. 당신들이 자신의 판결 앞에 떳떳하길 간절하게 빌 뿐이오. 당신들은 날 죽일 수 있어요. 나는 탄식하지 않을 것이며, 항의하지도 않겠소. 저항도 없을 거요. 그러나 당신들이 할 행위를 면제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 122p.
시민들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말에 동조했을 뿐이지만, 사실은 그들 모두 ‘일’을 죽인 살인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진짜로 돈이 급해서 ‘일’의 죽음에 동의한 이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하는 이유만으로 동의한 이도 있을 것이다. 애쉬의 동조실험을 아는가? 선분 세 개를 놓고 똑같은 길이의 선분을 찾으라고 했던 그 실험. 학창시절 그 비슷한 실험을 수행해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애쉬의 선분실험보다 더 모호한 조건이었다. 동일한 차를 두 잔 내어주고 맛의 차이를 구분하라 했던 실험이었다. (피험자 이전에 실험 도우미들은 나름의 차이를 지어내며 피험자에게 동조의 압박을 가했다.) 결과는? 전체 피험자(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약 50명이었던 것 같다) 중 단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동일한 차를 두고 ‘다른 맛’이라 평가했다.

5.

재고의 여지가 없어야 했는데 말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에서 성장하는 인물은 ‘일’이다. 일은 가족들에게마저 배신당한 상황에서,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고뇌하며 두려움을 극복해 낸다. 그리고 시장이 찾아와 자살을 종용할 때, 위 122p의 대사를 읊는다.

‘일’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썩을 놈이기는 하다. 그러나 극에 등장하는 모든 다른 인물들(시장, 교장, 시민들 등) 역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 역시 여사가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을 때 여사를 돕기는 커녕 비웃기만 했었다. 그 외에도 사실 자잘한 죄를 저지르지 않은 완전히 무고하기만 한 사람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는다. ‘일’을 처단하는 것을 ‘정의’라고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실상은 그들은 모두 그저 ‘돈’을 원하는 속물들일 뿐이면서 말이다. 그들에 비해 ‘일’은, 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공포를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한 이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여사가 주장하는 ‘정의’ 앞에, 즉 형벌에 저항하지 않는다.

작품 말미에는 작가가 작성한 ‘부록’이 있다. 작품을 쓰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나 주요 개념들을 정리해 놓은 노트 같은 것인데, 다른 개념들 옆에는 긴 문장을 적어두었으면서 ‘돈’이라는 개념 옆에는 ‘중요하다’ 딱 한 마디를 적어둔 것이 씁쓸하면서도 섬뜩했다.

그리고 귈렌의 시민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히틀러와 그 부역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목을 직접 조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다. 판결문에 동의한다고 손을 드는 것, 가스 살포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 이것들은 살인이다. 나아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폭력에서 눈을 돌리는 것.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 비판 의식 없이 다수에게 동조하는 것. 이것도 어떤 경우에는 살인이다. 그 무게를 우리는 언젠가 감당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죄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또 다른 이름의 살인은 아닌지를 늘 고심하고 또 고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고심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스스로 죄인지도 모르는 채 죄를 짓게 될 테니까 말이다.

6.

해설에서는 ‘일’을 영웅이 되었다고 평가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인정해 주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른 등장인물들보다는 인격적으로 나은 인물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돈 앞에 인간성을 포기한 기타 등장인물들의 행동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처지가 이해가 된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을 용인하거나 용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포장을 하려고 해도, 그들은 그저 살인을 저지른 것뿐이다. 그리고 교장이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그들도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주제 외적으로 또 강렬했던 것은, 여사의 감정선이다. ‘일’이 자신을 배신한 사실로 그를 단순히 증오한 게 아닌 것 같다. ‘일’이 들어갈 관을 치장하고, 그를 위해 무려 능까지 미리 마련해 두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말이다. 여덟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웠어도, ‘여사’가 되기 전, 남편들을 소유물이나 어디 내놓을 장신구 취급하기 전 했을 유일한 사랑다운 사랑일 테니까. (비록 끝은 배신이었어도.)

7.

‘물리학자들’ 역시 재미있기는 했으나 별달리 코멘트할 점이 없다. 체제 갈등, 그리고 무비판적인 발전(혹은 전쟁)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그 외 사용된 알레고리가 내게는 좀 난해했다. 유튜브에 극이 올라와 있다고 하니 일단 그걸 보고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난해하다고는 했지만, 의미를 분석하려고 할 때 그럴 뿐 극 자체는 충분히 흥미롭게 읽힌다. 특히 모니카가 뫼비우스에 의해 살해당하는 그 부분. 짧은 묘사임에도 비장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전반적으로 아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 역시 두고두고 여러 번 읽을 것 같다. 희곡 역시……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처럼 희곡의 희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쨌든 모든 희곡이 다 재미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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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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