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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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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 ‘최초’라는 말이 붙은 대부분의 것들은 ‘낡았다’라고 표현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최초’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시의적이다. 희곡치고 아주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유치하지 않다. 희곡 입문작으로도 추천할 만한 책이다. 아쉬운 점을 뽑자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후반부의 노라의 각성이 개연성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 이 역시 내가 ‘저항하는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은근함’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바, 나에게 이 작품은 아름다운 작품은 아니고, ‘재미있는 작품’쯤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노라가 초반에는 상당히 철이 없고 천진하게만 그려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자가 작품의 진행 내내 노라에게 일말의 비판 의식 없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다. ‘응원할 수밖에 없는’ 노라를 그려낸 것은 작가의 탁월한 실력에 공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3.5./5.0.


1.

사실 희곡은 늘 내 취향의 문학이 아니었다. 대사보다는 늘 묘사에서 감탄할 거리를 찾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묘사가 훌륭한 책이었다. 물론 ‘대사가 훌륭한 책’ 역시 몇 안다. 그러나 내게 훌륭한 대사는 ‘진짜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 같은’ 대사다. 그런 정의 때문인지 지금까지 읽어왔던 희곡은 내게 전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또한 어려웠다. 별다른 묘사 없이 대사만으로 상황을 이해하라니! 나는 안 그래도 사람들의 ‘말 속 숨은 뜻 찾기’(주로 돌려까기)를 굉장히 피곤해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또 너무 직관적이고 쉬우면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어 평가가 박해진다. 어떤 기준을 들먹여도 그냥 ‘별로 안 좋아하는 장르’였다, 나에게 희곡은.

그런데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읽었던 희곡들과는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어떤 형식적인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희곡을 잘 알지 못하니까.) 알 수 있는 것은 대사가 유치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생생했다는 것. 글을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에서 연극 한 편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점에서는 역자에게도 공을 돌리고 싶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아주 예스럽지도 않고 아주 촌스럽지도 않게 잘 번역한 것 같다.

헬메르: 노라, 말도 안 돼. 당신은 감사할 줄도 모르는군. 당신은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나?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헬메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라: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 116p.
그저 귀엽고 천진하기만 했던 노라가 ‘어머니’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각성하던 순간.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내 욕하고 싶던 헬메르에게 노라가 독자를 대신해서 그에게 한 방 먹여주었으니.

2.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읽기 편했던 것도 있다. 주연은 노라와 헬메르, 좀 더 확장한다면 크로그스타드와 린데 부인, 랑크 박사 다섯뿐이다. 그리고 그 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녀와 유모, 심부름꾼 정도다. 주연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다. 그 외 인물들은 구분이 무의미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이번에 이 ‘기타’ 인물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

말했던 것처럼 나는 묘사가 없으면 글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유모나 하녀와 같은 사람들의 대사가 묘사의 역할(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예를 들어, 누군가의 등장을 알릴 때)을 상당 부분 대신한다. 덕분에 주연들끼리의 교류가 (상황을 설명하느라 불필요하게 장황해지는 극문학 특유의 작위적인 대사 없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만 말미에서 노라가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집을 나가는 부분은 조금 개연성이 없이 느껴지기는 했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노라의 성장, 이 아니라 작가가 노라의 입을 빌려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라를 갑작스레 (충분한 개연성 없이) 성장시켜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노라의 명석함에 대한 감탄과 ‘우리 노라 이렇게 말도 잘하고 똑똑하면서 왜 그동안은 그렇게 살았니……’하는 탄식이 동시에 내뱉어진 부분이었다. 물론 당시의 가부장적인 시대상을 고려하면 노라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움이 든다.
헬메르: 저런, 기가 막히는군. 그렇게 당신의 거룩한 의무를 저버릴 수 있다니.

노라: 나의 거룩한 의무가 뭔가요?

헬메르: 그걸 내가 말해야 아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노라: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헬메르: 아니, 없어. 대체 무슨 의무지?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 118p.

3.

아마도 각성 이후의 노라의 모습이, 노라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보였던 모습과의 격차가 아주 크기 때문인 듯하다. 클라이맥스는 복선을 전제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클라이맥스(노라의 각성)를 지지해주는 복선이 그리 탄탄하지 않은 느낌이다. 물론 노라가 그저 ‘예쁜 백치’가 아니라는 건 중간중간 암시가 되기는 하지만, 노라는 그 스스로 그런 취급을 즐기는 듯했으니까. 노라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헬메르의 당혹이 여성 독자인 나로서는 상당히 기껍기는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작품의 형식상 아쉬움은 있을 수밖에 없다. (혹은 이마저 작가가 의도한 것이고, 나의 무식이 그것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페미니즘 소설이어서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게 한 몫을 했다. 말했듯 형식의 관점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다고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주제가 실현되는 방식의 통쾌함이 그 아쉬움을 압도한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당시의 주류 페미니즘과 결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의 여성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정신적인 법률이 두 가지 존재하고, 양심이 두 가지 존재한다. 남성 안에 한 가지가 있고, 아주 다른 한 가지가 여성 안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여성은 실제적인 삶에서 마치 이들이 여성이 아니고 남성인 듯이 남성의 법으로 판단을 받는다.

(중략)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순전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법을 만드는 것도 남성이며 소송을 걸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남성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일에 대해 판단한다.

- 134p, 작품 해설 중.
작품이 쓰인 건1879년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인권은 정말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평등은 남아 있다. ‘온전히 평등한 세상’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는 노라처럼 다른 누구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간’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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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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