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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킨 이야기, 스페이드 여왕

<벨킨 이야기, 스페이드 여왕>, 알렉산드르 푸슈킨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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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러시아 문학’(톨스토이나 도스도예프스키로 대표되는)의 전형과는 반대되는 특성을 많이 가진 소설. 그런데 알고 보니 푸슈킨이 러시아 문학의 전형이고 그들이 그 전형에서 벗어나는 고유한 세계를 가진 작가들이라고 한다. (당황스럽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편견을 깨게 해준 책. 그리고 국민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 책. 동화나 우화처럼 간략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문장들이 통찰력 있는 묘사로 채워진 덕에 유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변화되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1위에 늘 뽑힌다는 푸슈킨의 작품은 ‘구시대의 유물’로 불리기에는 지금 읽어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가볍게 읽기에도 좋은 책이라 푸슈킨 입문 작품으로 아주 추천한다.


1.

푸슈킨이 워낙 “러시아 문학 대부” 같은 느낌이 있어서, 사실 도스도예프스키의 <분신>에 크게 한 번 데인 적이 있는 나는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읽는 중간 정신이 많이 혼미해지기는 했다.) 지레 겁부터 먹고 시작한 책이다.

그런데 웬걸,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기만 한 게 아닌가. 현학적이고 복잡하고 주제가 뭔지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글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설보다는 동화나 우화에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벨킨 이야기는 푸슈킨이 벨킨이라는 가상의 인물(어느 지역의 영주)의 정체성을 빌려 작성한 다섯 개의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고, 스페이드 여왕은 그보다는 조금 길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워낙 짧은데다가 설명 역시 직관적이어서 스토리를 이해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 좀 클리셰적인 부분도 있는데, 책이 집필된 시기를 고려하면 이 책이 클리셰를 따른 게 아니라 클리셰의 원류가 이 책인가 싶기도 하다.

신분 높은 노파의 가난한 양녀만큼 의존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백작 부인이 악독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교계에서 항상 떠받들어져 버릇이 나빠진 여자가 으레 그렇듯이 변덕이 심하고 인색했으며, 자신의 시대에 사랑할 것은 이미 다 사랑했고 현재를 낯설어 하는 모든 나이 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차가운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중략)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집안의 수난자였다. 그녀는 차를 마실 때면 설탕을 낭비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소리 내어 책을 읽어야 했으며 작가의 모든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는 백작 부인의 산책에 동반해야 했으며 날씨와 포장 도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 140p.
상황묘사에 대한 부분들이 특히 좋았다. 예를 들면 스페이드 여왕에서 백작부인의 양녀 리자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이 무릎을 탁 치게 웃겼다. 또 사실 그대로의 묘사인데 시니컬하고 해학적이라 좋았다. 플롯이 간략하고 단순해서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런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묘사들이 그것을 적절하게 방지해 주고 있다.

2.

러시아 문학답게 이반 어쩌구비치 하는 이름이 많이 나오기는 했는데, 의외로 다른 익숙한 영어권 이름도 많이 나왔다. 물론 그들은 이 책에서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의 지위를 가지고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화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크게 우스꽝스럽거나 사실의 비약이 없는 게 특징인 것 같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다 선한 건 아니다. 비열하고 한심한 인간들도 많이 나온다. 그래도 읽고 나서 기분이 찝찝해지지는 않았다. 자기 전에 한 편 정도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책. 그리고도 아무 일 없이 괜찮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 책. (요즘 꿈자리 사나울 만한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다. 사실 유명한 러시아 작가인 도스도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사람들은 그냥 개인의 고유한 문학 세계가 독특한 것이지, 그들이 러시아 문학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왜 나는 모든 러시아 문학이 그들의 문학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직 “취향이다!”까지는 아니지만, 좀 더 많은 작품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3.

다만 말미의 해설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작품의 취지나 당시 푸슈킨 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한 것은 아니고 (그 정도로 러시아나 러시아 문학을 잘 알지도 못한다.) 독자가 작품을 접하는 마음 가짐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설에는 책을 읽으며 독자가 점점 화자와 심리적 거리를 두게 되고, 비판적으로 화자를 의심하면서 바라보게 된다고 했는데, 나는 딱히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화자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주로 전개되었으므로) 당연히 알고 있고, 화자가 말하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딱히 화자를 의심하거나 안 좋게 보고 싶지는 않았고, 그저 친근하게 혹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약간의 과장 쯤이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으레 그렇지 않은가 싶었다. 다만 화자가 곧 작가이고 그렇기에 절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문법의 소설에 익숙한 시대의 독자들이라면 해설자가 말한 대로 받아들였을 법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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