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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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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몰입감 있게 읽히는 책이다. 역사를 알고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모르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리고 역사를 알고 싶게 만든다. 완전한 사람, 혹은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고 믿는 바 개인에 대한 찬양조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확실히 네루다를 ‘독자가 거부감 없이 좋아할 수 있도록’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마리오의 순박하고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춰 읽어도 얻을 만한 점이 많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정치적인 묘사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연애 소설인 줄 알고 가볍게 펼쳤다가 씁쓸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게 되는 책. 그러나 다행히 많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적절한 유머로 마음이 회복할 여유를 중간중간 마련해 준다. 메타포와 운율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니만큼 번역서보다 원서가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다만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듯하다.


1.

서문부터 상당히 흥미롭다. 시인의 인터뷰에서 시작한 소설이라니. 원래 연애 소설 잘 안 읽는 편인데(처음에는 그냥 연애 소설인 줄 알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시를 찬양했다는 게 마음을 끌었다.

서문에서는 작가가 스스로나 작품에 대해 꽤 자기비하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유쾌하고 문장을 잘 가지고 노는 사람이라는 게 이미 느껴져서 딱히 걱정은 안 되었다. 일종의 유머인 듯싶다.

작품 내내 이 유머는 다양한 곳에서 적절히 사용된다. 네루다와 마리오의 만담, 베아트리스와 그의 엄마의 아주…… 직설적인 대화 등에서 특히 그렇다. 사실 이렇게까지 성적인 묘사를 강렬하고 또 외설적(나에게는 좀 그랬다)으로 한 책을 읽어본 적이 많이 없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런 성적 묘사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는데, 글쎄, 내가 읽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 중 이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책은 없었어서. 물론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내 식견이 짧은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의 당황은 당황이고, 청소년기의 정념적 사랑에 대한 묘사로서는 아주 효과적이고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기 비결이라고도 생각한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네루다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들어가려 했을 때 멀리 새가 나는 걸 바라보던 마리오가 말했다.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 28 - 29p.
원래 책 읽으면 인덱스를 기본적으로 10-20개는 붙이는 편인데, 지금 확인해 보니 이 책에는 딱 한 군데 붙어있다. 인덱스를 붙이고 싶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몰입해서 읽느라 인덱스를 붙일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특정 한 대사, 문장이 탁 튀게 마음에 드는 것보다 몇 페이지 통으로, 혹은 아예 챕터 전체로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2.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소설이 큰 갈등 없이 (베아트리스의 엄마와의 대립도 따지자면 갈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심각하거나 거대한 갈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게 진행된다. 게다가 주인공 격인 마리오와 네루다는 각각 순진함과 친근함을 무기로 삼아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심이나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편했고, 그래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그래서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책에서는 아주 곱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고르고 골라서 보여주는데,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서 이상한 욕구(주로 빈정거리고 싶은)가 좀 치밀기도 했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도달하기까지는 내내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감상이었다.

그러니 결말에서의 반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반부에도 정치니 민주화니 하는 얘기가 등장하지만 역시 주는 ‘시의 아름다움’과 ‘마리오의 사랑’이다. 정치 얘기는 곁들임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의 아이가 태어난 이후쯤부터는 상황이 급변한다. 그들의 역사를 그리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작품에 나와 있는 내용만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내내 평화로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참담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3.

우리나라의 현 정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피와 눈물로 기껏 이루어낸 민주화가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니. 과거 목숨과 정의를 맞바꾸었던 그들의 희생 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쩌면 내가 쟁취한 민주주의가 아니기에 그것을 유지하는 게 더 쉽다고 느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민주주의는 태어날 때부터 그냥 주어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3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상당히 관조적으로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흠. 아름답고 안타까운 이야기군.’ 하고.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뼈에 와닿게 섬뜩하다.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마리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최후를 우리가 맞이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 책에서 묘사하는 마을 사람들이 인상 깊었다. 따지자면 그들을 ‘대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아옌데를 지지했지만, 신념보다 생존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속사정이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몇 줄의 묘사로도 그들이 느꼈을 무력감이나 자괴감 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그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4.

이 책은 권선징악의 문법을 따르는 소설이 아니다. 현실이 그러하니 완전한 픽션을 쓸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전반부를 읽으면서 동화니 뭐니 했던 생각이 좀 죄스러워졌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화 같이 아름다울 수 있던 일상은, 부조리함과 폭력에 의해 얼마나 허무하고 쉽게 파괴되는가.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 결론적으로는 시에 대한 아름다움보다 결말의 참담함이 더 무겁게 남는다.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고민을 의도적으로 미뤄왔으면서도 글을 써서 벌어 먹고 살고 싶다고는 늘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네루다와 같은 사람들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하는 경각심이 든다. 어떻게 보면 참 사람 불편하게 하는 존재고, 작품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 느껴야만 할 것이다. 생존에 앞서 신념을 일 초 정도라도 앞에 둘 수 있으려면, 한 발 물러선 채로 그런 삶을 멋있다고 칭송만 할 게 아니라 실로 그렇게 살 수 있으려면 말이다.

줄거리 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베아트리스가 좀 전형적으로 마리오에게 주어지는 ‘포상’ 같은 느낌이 있다. 옛날 작품이니 감안하고 읽어야겠지만.

과부(베아트리스의 엄마)의 인물상이 상당히 흥미롭다. 정치적 신념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마리오/네루다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임에도 마냥 밉상은 아니다. 후반부에서도 분위기를 가볍게 해주는 감초 역할이라 그런가?

모든 대화가 메타포 투성이라 좀 길게 느껴지고, 가끔 리듬이 끊기기도 하는 부분이 있는데, 번역서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번역하는 사람 고생깨나 했겠는데.

빈둥거리는 마리오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철이 아주 없는데 내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철없음의 측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에 대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마리오가 부러웠다는 작가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나도 내가 존경하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5.

‘대중을 사랑하는 자는 좌파가 된다’는 생텍쥐페리의 말이 떠오른다. (적어도 이 작품 내에서 묘사된) 네루다는 확실히 대중, 민중을 사랑한 사람이다. 말했던 것처럼 나는 칠레 역사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다. 그런데 네루다의 작품은 좀 읽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대중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으니까. 색감 좋은 영화를 보는 듯한 감상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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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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