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컵을 훔치던 날
그날 새벽, 마음에 폭죽이 터졌다. 궤도를 이탈하 던 날 밤- 펑하고 터진 마음을 아프게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소란한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빛깔은 꿈결처럼 사라졌다. 번쩍 피어오른 빛깔은 금세 살아지고 말았지만 나는 그날 새벽 우리의 모습에 책갈피를 꽂았다. 함께 했지만 '함께'이지 않기도 했던.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가슴속 깊이 꼭꼭 감춰 두었던 것을 펼쳐 보였던 새벽이었다. 길고 매끈한 잣대로 잘잘못을 논하기엔 우린 너무 여리도록 생생했고, 어떤 마음이든 행동이든 감추지 못했다. 그저 붉은색 글씨로 너의 행복을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
비엔에서 방비엥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멀리서 보였다. 덜컹거리는 벤도 아니고 대형버스도 아닌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승용차를 타고 방비엥을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길게 쭉쭉 뻗은 고속도로는 적막했다. 1시간을 가도 2시간을 가도 방비엥으로 향하던 차가 우리뿐임을 인정해야 할 때 N이 툭 말을 던졌다.
"이래가지곤 되겠어?"
쭉쭉 쉬지 않고 달리던 고속도로 위에서 지난 방비엥을 오갔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새벽에 도착한 비엔 공항에서 N이 예약해 둔 벤에 오르며 J에 어깨에 선잠을 잤던 순간. 1박에 꽤 많은 돈을 주고 묵었던 숙소를 두고 N은 저 방이 왜 저 값인지를 모르겠다고 혀를 끌끌 찼던 때였다. 묵을 방이 없을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방비엥의 하루를 채우던 때는 이제 먼일이 되었다. 루앙에서 방비엥으로 향하던 비포장 산길에서 J의 손을 꼭 잡고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때. 그렇게 도착한 방비엥은 우기의 축체 끝무렵이었다. 얇은 비를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N이 잡아준 I호텔을 찾느라 정신없던 J와 나. 모든 것들이 생생한 와중에도 우리가 어째서 또, 라오스에 온 것인지 자꾸 모르겠던 때였다.
코로나가 지나간 흔적이 가득한 방비엥에 도착했다. 바글바글 했던 여행자의 거리는 온 데 간 데 없고 오토바이를 탄 현지인들만 간간이 보였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익숙한 가게에 들어가 볶음밥과 쌀국수와 김치, 비어라오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볶음밥을 입에 넣고 비어라오를 마시며, 아무도 없는 거리를 내내 보았다. 사람이 없는 방비엥이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아 자꾸 지난 풍경들 속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때 그 사람들은 뭐 하냐고, 그때 그 장소는 잘 있냐고, 그때 그곳은 어디였냐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그들의 일상은 안녕했냐고.
"방비엥 가면 신닷 먹자!" J가 말했다.
그리움은 잊지 못한 맛으로도 기억되기도 한다. 라오스 하면 떠오르는 음식 서열 3번째다. 은색 불판 위에 얇은 고기가 금세 익어 갔다. 불룩 솟은 불판 아래로 담긴 육수에 야채와 계란, 얇은 당면을 넣고 익은 야채를 고기와 함께 먹는 음식. 몰래 가져온 소주가 입에 착~ 감겼다. 코로나를 무사히 보낸 셋이 또 마주 앉았다. 웃는 거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내내 먹고 싶었던 신닷을 먹고, 잔을 부딪히고 늘 그렇듯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잘 버티고 살아온 생존의 기쁨을 잠시 누리는 시간. 반갑고, 그리웠고, 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시간 안에 그저 앉아 있었다. 배도 마음도 두둑이 부른 채 밖으로 나오면 손만 뻗으면 닿을 거 같은 검은 하늘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거 같아 손을 뻗고 사진을 찍었다.
언제부터 초록색으로 'Beerlao'라고 박힌 유리컵을 가지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비엔의 자주 가는 바에서 긴 유리컵을 살 수 있냐고 물었는데, 단칼에 안된다는 직원에게 심통이 났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 때문에 직원이 술도 안 따라 준다며 N의 핀잔을 들었지만 나는, 그 직원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꾸 안 된다고 하니 더 가지고 싶은 마음마저 들어 그때부터는 어느 식당에서든지 '컵'이 눈에 들어왔다. J와 나는 어떻게 하면 컵을 구할 수 있는지 진지해졌다. 신닷을 먹고, 남은 소주를 들고 쏭강 주변 어느 식당에 앉았다. 강변 주변으로 불빛이 은은했고, 사이가 두텁지 않을 때 N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건넜던 다리가 어디쯤인지 헤아려 보았다. 비어라오와 함께 입구가 크고 작고 통통한 유리잔이 나왔다. 작은 잔에 얼음을 넣고 비오 라오를 따르면 나는 그 얼음이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거 같아서, 비어라오는 꼭 그 투명잔에만 먹고 싶었다. 반드시 얼음과 함께 먹고 싶었고, 그래야 맛있고, 그렇게 먹는 비어라오가 좋았다.
고요하고 조용한 쏭강의 밤이 깊어졌다. 먼저 일어선 N을 따라 일어나려던 찰나 J가 자신 앞에 놓인 유리컵을 들고 별안간 말을 뱉었다.
"어 맥주가 남았네, 우리 들고 가서 마시자"
그녀는 컵을 들고 앞서 가던 N을 따라 걸으며 깔깔거렸다.
자연스러운 J의 모습을 따라 하며 나는 내 앞의 잔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식당을 벗어난 뒤에서 터뜨렸다. J의 기막힌 돌발행동이 하도 웃기고 별안간 컵이 생긴 것에 대한 기쁨 때문에 밤하늘에서 우리는 아주 커다랗게 웃었다. 오줌보가 터질 거 같아 방관에 있는 대로 힘을 주며 나는 눈물까지 훔쳐냈다. 그녀와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N이 담뱃불을 끄며 산통 깨는 소리를 했다.
"너네 컵을 훔친 거야?"
우리에게 머물던 그의 당황스러움과 놀라움, 세상에 이런 애들이 있다는 식의 눈빛, 말이 익숙해진 터라 아랑곳없는 J가 이어 말했다.
"아니요!! 맥주가 남아서 들고 온 거예요!!!"
우린 더 크게 웃었다.
그렇게 생긴 두 개의 컵 중 하나만 남은 컵을 꺼내 얼음을 넣어 맥주를 마시며 나는 어느 날엔가 웃기도 했고, 어느 날엔가는 애처럼 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