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액자

by 즈징

- 起 -


밤, 갓 9시 정도 되었을까. 도시 외곽 동네의 작은 카페. 아파트 상가에 세 들어있는 처지라 외부 장식은 여느 프랜차이즈 카페들만큼 화려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내부에는 만화 피규어와 보드게임, 문학 잡지 같은 소품들이 저마다 분위기를 내고 있다. 카페 사장은 조용한 동네에서 커피만 팔아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소모임들에 카페 공간을 제공했다. 장소제공비를 모임 사람들이 사는 커피값으로 갈음하니 꽤 괜찮은 조건이어서 매달 다양한 모임이 열렸다. 사장 자신도 대학 국문과였던 출신을 살려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회원은 모두 네 명. 병욱은 그중 한 명이었다.


“병욱 씨 오늘 글도 되게 좋은데요. 너무 풋풋해.” 병욱의 글을 읽은 사장이 말했다. “이런 사랑을 해본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네. 글에 나오는 등장인물 둘 다 너무 순수하다. 서로 마음이 있는데 고백은 안 하고 간만 보는 거. 근데 여자 쪽이 더 적극적인 거지. 오히려 사랑을 잘 모르니까 더 과감해질 수 있는 거랄까. 이게 요새 일본 애니 쪽에서도 그런데, 시대를 반영해서 이성에게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여자가…….”


“사장님 그만.” 병욱 옆에 앉은 여자가 사장을 익숙하게 제지했다. “저도 진짜 재밌게 잘 읽었어요. 오늘 쓴 것까지 해서 몇 회였죠?” 항상 향수를 짙게 뿌리고 오는 여자. 전에는 병욱에게도 선물이라며 디퓨저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인공 느낌이 짙은 향을 왜 좋아하는 걸까, 병욱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6회입니다.” “육회 먹고 싶다.” “사장님 잠시 30분만 숨을 참아주세요.” 사장을 혼낸 ‘향수’는 다시 병욱을 바라보았다. 병욱은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6회까지 오면서 남주랑 여주 사이에서 계속 주고받는 교감이 정말 따뜻하고 세심하고 사랑스럽고… 아직 썸 단계이긴 하지만 너무 부럽네요. 병욱 님의 낭만적인 면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이런 썸… 다시 한번 타봤으면 좋겠네요.”

‘향수’의 평이 끝나고, 병욱은 남은 한 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소 수척해 보이는 여자가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오늘처럼 흰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 병욱은 항상 그녀와 옷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야기 진행이 빠른 느낌이 있어요.” ‘흰티’는 다른 사람의 글에 덕담만 늘어놓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다. “간결한 문체를 좋아하시는 건 알겠는데, 이야기 진행에 중요한 부분에서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의 배경이나 분위기 묘사는 더 자세하게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이 글이 흥미롭고 흐름이 마음에 드는데, 글이 전반적으로 좀 가벼운 느낌이에요. 할 말만 하고 빨리 지나가는 그런 느낌?”


사장과 ‘향수’가 병욱의 눈치를 보았지만, 병욱은 살짝 웃으며 지적에 감사를 표했을 뿐. ‘흰티’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병욱 씨한테 궁금한 점이 있어요. 지금 주제로 총 여섯 장의 글을 쓰셨는데…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 부분에서는 좀 구체적인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때 4회 때였나, 둘이 같이 벚꽃축제 갔던 거나… 출퇴근 카풀 하면서 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든가 직장 내에서 생기는 해프닝들? 이쪽 묘사는 되게 생생해서 실제 있었던 일을 보는 거 같은 느낌이에요. 요새 인터넷에 올라오는 짧은 드라마 같은 거, 뭐라고 하더라…….” “웹드라마?” 사장이 끼어들었다. “아 맞아요, 웹드라마. 꼭 그런 연애물 보고 있는 느낌?”


그러자 사장이 말을 보탰다. “맞아 맞아. 사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병욱 씨한테 물어볼까 말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지금까지 병욱 씨 글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계속 에세이나 무슨 호러 소설 같은 거 썼었잖아. 한번 역사물 써보겠다고 했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게 나오기도 했고. 이런 연애물 쓰는 건 거의 처음이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어요? 여자 쪽 행동이나 묘사도 그렇게 어색하지가 않아.” ‘향수’와 ‘흰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든 결론은, 이거 병욱 씨 연애 이야기지? 전 여친 이야기? 아니면, 현재진행형?”


‘향수’가 병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욱은 점잖게 웃으며 답했다. “다들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건 제 이야기는 아니고요. 저 말고 주변 지인이나 인터넷 연애사 주워들은 걸 모아서 한번 섞어 써 본 겁니다.” 그의 설명에도 사장과 ‘흰티’는 여전히 미심쩍어했다. “다들 병욱 님이 거짓말하고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다 와서 잘 버무린 거겠죠.” ‘향수’가 병욱을 변호해주었다. 그제야 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병욱은 ‘향수’에게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다른 사람들의 글까지 다 읽고 비평이 끝나니 10시가 다 되었다. 사장은 뒤풀이로 근처 호프집에 가자고 사람들을 꼬드겼다. 병욱도 맥주 한잔하고 싶던 터라 사장 옆에 섰다. ‘흰티’는 내일 일정이 있어 참여가 어렵겠다고 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같은 여자 회원이 불참하자, ‘향수’는 김이 샜는지 자신도 일찍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자 병욱이 그녀에게 다가가 같이 한잔하러 가자고 권했다. 오늘 사장과 ‘흰티’의 추궁에서 구해주었던 것이 고마워서였다. 병욱의 권유에, ‘향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마음을 바꾸었다.


뒤풀이까지 마치고 정말 헤어질 시간. “내일 가게 문 늦게 열어야지…….” 사장은 맥주를 많이 마셨는지 축 늘어져 걸어갔다. 병욱도 ‘향수’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 하는데, ‘향수’가 그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병욱 님 소설 얘기, 진짜 병욱 님이랑 아무 상관 없는 거 맞죠?” 느닷없는 질문에 병욱은 당황했다. “네……. 그때 얘기했듯이 다 다른 사람 이야기예요.” ‘향수’는 술기운 오른 얼굴에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병욱은 그녀에게 두 배로 미안해졌다. 앞서 모임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합쳐 두 번의 거짓말을 했기에.




- 承 -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축제 행사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상대로 대부분 커플이었다. 나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D는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직장에 있을 때와 다르게 생기로 가득 찬 그녀는 나를 끌고 커플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 다녔다. 그날 하루 우리는 벚꽃 터널을 지났고, D가 만들어 온 김밥 도시락을 먹었으며, 벚꽃차를 덖었고, 버스킹 공연을 감상했다.]


글쓰기 모임으로부터 며칠 후. 휴일이 다 끝나고 출근할 생각으로 심란해지는 일요일 밤. 병욱은 자췻집 방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 모니터에는 지금까지 써 온 소설 내용이 떠 있었다. 지난 모임에서 그는 소설 바탕이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었지만, 사실은 그의 경험담이었다. 아직 봄이었던 몇 달 전, 그는 글에서처럼 벚꽃축제 행사장에 있었다. 수많은 커플, 불편한 느낌, 벚꽃 터널, 벚꽃차, 버스킹 공연 모두 실제로 경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를 끌고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 다닌 D까지도. 그녀의 실제 이름은 지우 ― 이제는 병욱이 ‘여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글에서 유일한 거짓은 김밥 도시락이었다. 지우는 요리를 싫어한다. 병욱은 글의 다른 쪽을 넘겨보았다.


[한번은 같이 출장을 가는 중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구닥다리라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야 했을 때, 그녀는 너무도 다소곳하고 진지한 자세로 전화기를 들고 있어 주었다. 또 한번은 사무소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 나에게 전화가 와서 대화가 끊어졌는데, 내가 전화를 끊자 바로 앞으로 와서 내 말을 기다리는 바람에 웃어버릴 뻔했다.]


글에는 병욱과 지우가 직장에서 같이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이 여럿 담겨 있었다. 병욱은 스타트업의 매니저로 일하던 중 신규사원으로 들어온 지우를 처음 만났다. 매니저로서 일차적인 직원 관리를 맡아 그녀의 직장생활을 도와줄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집이 병욱의 집 근처여서 자연스럽게 그의 차로 카풀을 하게 되었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여름이 완연해진 어느 날, 병욱은 깊어진 마음을 고백했다. 지우는 곧바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가진 뒤 그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금사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병욱이었지만, 지우에게 빠져드는 것은 말 그대로 금방이었다. 지우는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다정한 말씨에 다른 사람을 세심하게 챙길 줄 알아 항상 사무실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몸집이 작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지우 이전에 만난 여자들이 키가 크거나 통통했던 편이어서, 이번에는 다른 스타일의 여자를 만나보고 싶었던 것. 게다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에게는 새내기의 풋풋함이 있었다. 처음 맡아본 직장 업무에 허둥대는 모습, 카풀에 대한 감사로 선물과 편지를 수줍게 건네는 모습, 그리고 직장 동료에서 연인으로 급변한 관계에 익숙지 않아 보인 말실수까지도 ― ‘오빠’라는 입에 익지 않은 명칭으로 부르려다 실수로 ‘아빠’라고 말해 이를 두고두고 놀렸다 ― 병욱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처음에 그는 지우와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한 경험들을 모아서 글이나 써 보자 했던 것이었다. 자신이나 지우가 특정되지 않도록 배경 설정을 바꾸었다 ― 회사는 공기업의 ‘사무소’로, 공동 대표이사 두 명은 각각 ‘소장’과 ‘과장’, 본인과 지우는 ‘주임’과 ‘신입’.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모티프를 따온 실제 인물의 것을 대부분 따라갔다. 사소한 변경이 있다면, 글 속의 여자 주인공 D는 지우와 다르게 요리를 좋아하는 것 정도. 다만 병욱은 ‘과장’의 모티프인 대표가 평소에 깐깐하게 구는 것이 싫었기에, 글에서 그를 매우 바보같이 묘사했다. 어쩐지 요새 사무실에서도 꽤 멍청하게 굴지 않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의 흐름은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병욱의 경험을 천천히 따르고 있었기에, 작중 남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 있는 썸을 타고 있는 정도.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저번 모임에서도 이를 두고 사람들이 입을 대긴 했다. ‘향수’가 말했다. “지금 분위기 좋잖아요. 둘 사이에 위기가 생기면 재밌긴 하겠지만, 마지막에는 그대로 둘이 사귀는 쪽으로 끝나면 좋을 거 같아요. 해피엔딩이 보고 싶어요. 요새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들은 다들 스토리를 못 꼬아서 왜 안달인지 몰라.”


‘흰티’는 반대였다. “근데 그러면 글이 너무 밋밋하지 않나요. 그냥 ‘사랑 시작, 사랑 도착!’ 같은 느낌? 읽는 사람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려면, 지금까지 쌓아온 기대감을 확 무너뜨리는 반전 같은 게 있어 줘야죠. 사실은 둘 중 누군가에게 비밀이 있었다, 뭐 그런 거.” 사장이 눈을 반짝였다. “반전? 반전 그거 좋지. 병욱 씨 호러물 잘하잖아. 싱그러운 사랑 이야기에서 공포 쪽으로 급커브 꺾어버리자고. ‘데이트 장소에 가보니 모든 것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현실과 환상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고고하게 서 있는 그녀. 두 세계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장에게 ‘향수’와 ‘흰티’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사장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마무리 방법을 놓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오래오래 예쁜 사랑 했습니다? ‘흰티’의 말마따나 이러면 글이 너무 밋밋하다. 그렇다고 급커브를 튼다면 어떻게 틀 것인가. 전 여친들과 깨졌던 이유를 써먹어 볼까 했지만, 작중 둘은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고민하던 병욱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벚꽃축제에서 웃고 있는 지우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유리가 왜 이리 헐거워졌지. 병욱은 액자를 뒤집어 들고 유리를 단단히 고정하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액자와 씨름하는 중에, 언뜻 예전 지우의 말실수가 떠올랐다.




- 轉 -


밤 11시께. 늦가을로 접어드니 바람이 꽤 쌀쌀하다. 차가운 날씨와는 달리 호프집 안의 분위기는 따스하고 떠들썩하다. 오늘도 글쓰기 모임 사람들은 뒤풀이 중이었다. “아니, 이야기를 그렇게 끝낼 줄은 몰랐다니까 진짜?” 사장이 맥주잔을 내리며 말했다. “이전까지 여자가 남자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데. 그러니까 같이 벚꽃축제에 가고, 직장에서 ‘꽁냥꽁냥’ 하고, 남자가 아플 때 죽까지 만들어서 집에 갖다 준 게……. 남자를 이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체품으로 보고 한 일이라는 거잖아.” 병욱이 늘상 짓는 어설픈 웃음으로 답했다. “네, 뭐… 그런 반전이 있었던 거로 한 거죠. 남자가 보기엔 이성적 접근이었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아버지한테 보이는 아이의 애정이었다… 뭐 그런 거죠.”


“‘엘렉트라 콤플렉스’까지 가는 건가 싶었네요.” ‘흰티’의 급진적 추측에, 병욱은 ‘여성이 부친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는 증상’까지 고려한 건 아니었다고 밝혔다. “어쨌든 재밌었어요. 거봐요, 역시 스토리에는 반전이 있어야 재밌잖아요.” 취기가 도는 ‘흰티’는 보통 때와 다르게 표정도 풍부하고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 오늘 최고 반전은 이런 사소한 게 아니잖아요. 소설 플롯이 병욱 씨의 지금 사랑 이야기였다니. 저번에는 그렇게 아니라고 잡아뗐으면서! 소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소설이라니까요. 주인공 병욱 씨의 반전 고백이 있기 전까지 주변 인물인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사장도 맞장구를 쳤다. “해석 재밌네. 옛날에 학교에서 배운 ‘소설 밖의 소설’ 같은 건가.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병욱은 답을 알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모임에서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연재를 따라가며 사람들의 의심이 점점 커졌고, 이번에는 확실히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그를 흔들었다. 여럿이서 집요하게 쏘아붙이니 당해낼 도리가 없어, 병욱은 실토했다. 에이 설마, 내 그럴 줄 알았다, 병욱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등등으로 점철된 시간이 10분가량. 그 푸닥거리를 떨어놓고도 호프집까지 와서 계속하는 둘을 보고 병욱은 진절머리 쳤다. 그나마 한 명이 줄어서 다행이야. 모임 활동이 끝난 후 ‘향수’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뒤풀이에 참여하지 않고 일찍 집에 갔다.


시끄러운 와중에 병욱은 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나 해서. 그녀에게 오늘 글쓰기 모임이 있고, 뒤풀이까지 할 수 있다고 미리 말해두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연락 없이 밤을 넘겼다간 지우가 삐칠 수도 있으니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친을 두니 번거로운 부분이 있구만, 병욱은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만큼 지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요즘 그녀는 여태까지 자신 없어 하던 요리에 뜬금없는 열의를 보였다. 다음번 나들이 때는 꼭 김밥을 준비해 병욱에게 먹이고 싶다나. 이런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입술이 싱긋거리려는 것을 억누르고, 병욱은 전화를 확인했다. 지우에게서 온 메시지. [지금 연락될까요] 끝.


위화감. 지우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좀 더 애교가 섞여 있다든가, 단문의 메시지 여럿을 연이어 보낸다든가 하지. 딸랑 두 단어로 메시지를 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슨 일이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오길 기다리며 병욱은 다시 모임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었다. 아니, 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에 제대로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다. 눈이 수시로 전화에 갔지만, 지우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욱은 잠시 일이 생겼다 말해놓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남자 둘이 담배를 피우며, 바닥에 떨어진 맥주병을 발로 차고 있었다. 병욱은 담배 냄새를 피해 멀어지면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우가 전화를 받은 것은 병욱이 첫 번째 통화를 헛방치고 다시 걸었을 때였다. 상황을 묻는 병욱의 질문에, 지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나지막이 흐느끼기만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병욱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침착하게 ‘내가 그동안 지우에게 잘못한 일’ 리스트를 떠올리고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지우가 입을 열었다. “나 진짜 더는 못하겠어요……. 남친, 여친처럼 지내는 거, 그만하고 싶어요.” 지우의 갑작스러운 선언. 급하게 가게를 나와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단번에 병욱의 몸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병욱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지우가 방금 했던 말은 그가 들어 본 ― 아니 ‘써 본’ 말이었다. 글의 결말에 썼던 대사와 완벽하게 똑같아서,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혼란스러워하던 병욱이 멈칫했다. 머릿속에서 지우인 듯, 아닌듯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지우는 원래 요리를 싫어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밥이 만들고 싶어졌어요.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요. 그녀는 당신과 행복한데, 나만 혼자 불행해지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우리’는 같아져야 해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쨍그랑. 유리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호프집 앞에서 담배 피우던 남자들이 맥주병을 너무 세게 걷어찬 모양이었다. 하지만 병욱에게는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그는 책상 위의 액자를 떠올렸다. 헐거워진 유리가 흘러내려 바닥에서 깨지고, 담겨 있던 사진은 붙잡는 것 하나 없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환상 속에서, 병욱은 이제 글도 현실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잠자코 이야기의 끝을 기다렸다.


전화 너머에서 글 속에서 지우가 D가 말했다. “사실 저는 매니저님을 주임님을 처음부터 남자로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 제게 너무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어렸을 때 가져본 적 없는 아빠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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