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즈징


“그러니까, 당신들이 믿는 신은 혼자서 해와 달을 만들었다는 거죠?”


“방금 설명해 드렸지요. 땅에 푸른 싹이 돋게 하신 후에 하늘의 궁창에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셨다고. 하나는 낮을 다스리게끔, 보다 작은 하나는 밤을 다스리게끔 하셨다고.”


“네네, 그러고 나서 나흗날이 지났다고. 다 기억해요. 바다 건너 사람들이 믿는 신은 정말 위력이 대단하네요. 처음 만들어진 해와 달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거잖아요.”


어딘지 언제인지 알 수가 없는 혼란의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미약하고 울렁거리는 대화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찍이서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덧 내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마리아 자매님, 그럼 해와 달이 지금 것이나 옛것이나 매한가지지, 언제 달라진 일이 있었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요. 세상이 생겨난 후 태양은 모두 네 번 사라졌고, 그때마다 세상은 멸망했어요. 지금의 세상은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예요. 은하수의 신과 대지의 여신이 결혼했는데, 400명의 아이를 낳고 나서 여신은 남편과 관계 맺기를 멈추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여신은 새로이 임신했고, 자식들은 어머니가 부정한 관계를 한 줄 알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죠. 이를 눈치챈 뱃속 아이는 미리 무장을 갖추고 전사의 모습으로 뛰쳐나와 400명 형제를 모조리 죽였답니다. 이후 죽은 형제들의 머리를 하늘로 던져 별로 만들고, 누나의 머리를 던져 달로 만들고, 그 자신은 해가 되었어요. 다섯 번째 태양이 된 거죠.”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도시 ‘텍스포코’를 향한 원정길 중간의 숙영. 수도사는 원주민 소녀를 올바르게 개종시키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원래 ‘메스틀리’였지만, 곧 세례를 받고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리아는 원정대가 오솔길을 행군하던 중 길가에서 처음 만났는데, 텍스포코의 군대가 쳐들어와 그녀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지옥도에서 겨우 살아 빠져나왔다고 한다. 부모에게 팔린 후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탓에 여러 부족의 언어를 알았고, 이런 능력은 이 땅을 정복하려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해 그녀를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언어 능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그녀는 수도사와 며칠 이야기를 나누어보고는 금세 우리말을 익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준에 이르렀다.


“그릇된 우상 신화로군요. 형제를 400명이나 죽이는 존재가 태양이 되고 신이 된다는 건 정말 얼토당토않습니다. 자매님, 그런 잔혹한 괴담은 하루빨리 잊어버리고 저와 함께 성경을 열심히 배워 참된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심판의 때가 오면 천국으로 들어가 지옥의 유황불을 피할 수 있지요.”


“왜 성경을 배워야만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자는 모두 도둑이고 강도이기 때문에.” 내가 입을 열었다.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수도사가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요한복음서 10장 1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올바른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이만이 천국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단과 이교도들은 주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화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바닷물에 빠져 파도에 밀려다녔다. 아니, 어쩌면 강물일지도 모른다. 하늘에서는 초록 비가 내렸다. 나는 앞에서 빠르게 풀려 지나가는 시간의 씨실을 잡으려 애썼다. 실을 붙잡으려 했으나 워낙 지나가는 위세가 강해 실을 잡은 손에서 피가 터졌다. 핏빛이 보라색이었다. 사방으로 튄 피 때문에 세상은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분명히 대장님과 저랑 약속했었잖아요. 여기 사람들과 말이 통하게 해주고, 길잡이를 해주고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텍스포코를 정복해 이 도시에서 당신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챙길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여기 추장의 멱을 딸 수 있게만 해달라는 거였어요. 어차피 도시는 당신들 마음대로 다스릴 거 아니었나요. 실컷 고생해가며 정복했는데 그 새끼 하나 죽이는 건 왜 안 되는 건데!”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세상의 한쪽에서 흰색 물결이 일었다. 물결은 마리아로부터 왔다. 나를 매섭게 몰아붙이는 그녀의 목소리. 이전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악독함이 묻어 있어 나는 놀랐다.


“총독께서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신다. 앞으로 이 나라의 수도까지 도모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중간기지가 필요한데, 텍스포코는 그 중간기지가 되어줄 도시다. 그 역할을 탈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곳을 다스려온 추장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각하의 판단이야.”


마리아에게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설명했을 때,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처음 통역을 맡겼을 때 그녀의 태도는 너무도 불량하여, 부관 알론소가 참지 못해 그녀를 걷어차고 칼을 빼 들어 베어 버리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이후로도 태업이 이어지자 나는 그녀와 협상을 했다. 네가 우리를 열심히 도와준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너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마지막으로 모셨던 주인님은 저를 마치 친딸처럼 예뻐해 주셨어요. 비록 노예의 멍에를 벗을 순 없었지만, 제게 함부로 대하신 적이 없고 언제나 다정히 말을 걸어주셨지요. 안주인께서는 제게 예쁜 옷 짜는 법과 맛있는 타말레를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이렇게 좋은 분들을 죽게 만든 텍스포코 사람들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중에서도 그들을 이끌어 우리 마을을 침략하게 시킨 추장이 가장 미워요. 내가 여기 사람들 다 죽이겠다고 한 거 아니잖아요. 소원 하나라고 했으니 딱 한 명만 죽이면 된다고 했잖아요. 추장 하나만 죽이게 해달라고! 그렇게 해준다고 대장님이 자기 입으로 약속했잖아요!”


그랬나. 내가 그렇게 약속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랬다. 어떻게든 마리아의 마음을 돌려보려 아무렇게나 약속했다. 아마 소원으로 텍스포코의 지배권을 빌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들어주었으리라. 그녀의 능력이 너무도 간절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총독의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다. 나는 하급 귀족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뒷배가 없는 처지다. 불응했다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대장님, 제발……. 대장님이 말하는 총독이라는 사람이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죽이고 나서, 그 사람한테는 추장이 병으로 죽었다고 전해요. 아니면 사고를 당했다고. 아니, 아니지. 이교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감히 주님을 욕했다고 하세요. 주님을 욕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져야 하잖아요. 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도둑이잖아요. 그런 놈은 죽어야 하잖아요…….”


“…미안하다.”


마리아는 울었다. 흡사 야생의 동물이 포효하듯 울었다. 커다란 울음소리에 밀려 나는 다시 떠돌았다.





보랏빛 핏물 위를 얼마나 떠다닌 후인지. 순백으로 빛나는 모래사장에 표류했다. 한참을 물결에 밀려다녔기에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엎드러져 있을 수밖에. 그런 와중에 옆에 모래가 곱게 밟히는 소리. 남은 힘을 간신히 짜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마리아가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마리아가 물었다. 나를 차갑게 째려보는 채로.


정복한 텍스포코에서 지배권을 확립하고 군사를 재정비하는 동안, 총독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원주민 왕이 살고 있는 수도로 가서 그 위용을 직접 확인하라는 것. 우리가 올리는 보고를 바탕으로 총독은 새 원정대를 꾸릴 것이다. 그리고 그놈들은 우리가 개고생하며 뚫어놓은 길을 편안하게 걸어와 이 나라의 수도를 정복하는 공을 챙기겠지.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나요.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수도로 향하는 길이 맞는지, 방금 만났던 부족 사람들에게 당신의 질문을 똑바로 전달했는지, 혹시 시키지 않은 말을 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도시를 떠난 이후로 내가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단 한 번도 진실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재주 부리는 곰 신세가 되었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정비를 마친 병력을 이끌고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당연히 마리아도 함께했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 텍스포코의 추장에게 복수하지 못한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마리아는 마치 처음 그랬던 것처럼 통역하는 일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나빠졌다. 현지 부족에게 길을 묻는 말을 한참 뜸을 들이다 전하기도 하고, 부족민의 대답을 처음에는 이렇게 전달하더니 나중에 자기가 잘못 이해했다면서 저렇게 말을 바꾸기도 했다. 우리를 적대하는 나라의 한가운데 떨어진 상황에서 유일한 길잡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원정대 전체에 큰 위협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는데, 이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빌어먹을 년이 분수도 모르고!” 알론소가 말에서 내려 마리아의 따귀를 때렸다. 마리아가 쓰러졌다.


“이 혓바닥만 살아 나불거리는 것아. 까무잡잡한 무어인 같은 것! 네년이 입 좀 잘 놀리는 것 때문에 우리가 받아주고 이름도 주고 먹여주고 돌봐주었더니, 이제는 숫제 네가 우리 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구나. 그래, 네년이 처음에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고 뻗댈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 그 배때기를 찢어버려야 했어!”


“그만두게, 알론소.”


“대장님, 이제 마리아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버러지가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왕의 도시에 다다를 겁니다. 허락만 주시면 제가 이년을 당장에…….”


“알론소 가르시아 제1소대장!”


나는 호통을 치며 알론소를 밀쳤다. 알론소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리다, 나에게 실례를 구하는 말을 뭐라 중얼거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진 마리아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마리아는 일어나다 말고 나를 안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사이, 그녀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저 괴물의 심장을 뜯어버릴 거예요.”





환상과 환상에 환상을 지나, 온몸에 감각이 돌아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마치 영겁과도 같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어둠 속에서 붉은 뱀 여럿이 춤추는 듯했다. 차츰 시야가 또렷해지고, 귓속의 멍함도 가셨다. 그제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횃불로 밝히고 있는 깊은 밤, 나는 원주민들이 쌓은 피라미드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랫동안 행군한 끝에 우리는 왕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정대를 경계하는 수도의 경비병들에게, 나는 마리아를 시켜 우리가 평화를 바라고 찾아왔으며 이곳을 통치하는 위대한 왕을 알현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마리아는 말을 전했는데, 경비병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를 곁눈질하며 몇 번을 다시 물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수도에서 통용되는 언어에는 익숙지 못해서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경비대의 인솔하에 우리는 도시에 입성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도시의 커다란 규모와 압도적인 풍요에 구경하다 넋이 나갈 뻔했다. 그리고 곧 넋이 나가게 되었다. 일순 경비병들이 우리를 향해 돌아선다 싶더니, 경비대장이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한꺼번에 우리를 덮쳤다. 목숨을 걸고 항전했으나 준비 없이 갑작스레 맞은 공격에 우리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는다.


부족민들이 내 앞에 있던 이를 끌고 갔다.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그를 길고 넓은 바위 제단 위에 놓았다. 불빛에 의지하여 자세히 보니, 그는 텍스포코의 추장이었다.


“태양이 승리하려면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북쪽과 남쪽의 수많은 별과 싸워야 하고, 빛의 화살로 별과 어둠을 모두 쫓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남은 생명을 태양에게 먹여야 한다. 태양을 위해 희생할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던 당신은 그 신성한 책무를 저버렸어요. 보잘것없는 미물들의 목숨이 가엽다는 가당치 않은 이유 때문에. 이에 우리는 당신의 심장과 시간을 바쳐 신들께 사죄하나니.”


마리아가 제단 옆에 서서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을 뇌까렸다. 주문이 끝나자 화려한 차림의 사제가 나섰다. 흰색 깃털로 장식된 추장의 몸을 마주해 그 팔을 들어 올리더니, 열려 있는 옆구리를 향해 흑요석 칼을 찔러넣었다. 추장의 몸이 고통으로 들썩거리는가 했지만 그 움직임이 작았다. 사제는 옆구리를 노련하게 갈라놓고는, 손을 집어넣어 몸속의 장기를 헤집었다. 옆구리에서 피와 시뻘건 내장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이윽고 사제의 손이 빠져나왔다. 그 손에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주인에게서 떨어졌건만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이. 사제는 그 심장을 하늘로 들어 보였고, 숨이 떠난 몸뚱아리는 피라미드 밑으로 굴려버렸다.


다음으로 끌려간 이는 부관 알론소였다. 먼저 끌려간 추장과는 다르게 알론소는 의식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는 자신을 제압해 제단에 눕히려는 부족민들에게 순순히 끌려가지 않았지만, 뒤통수에 곤봉을 얻어맞자 이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추장의 피로 지저분해진 제단 위에 놓였다.


“바다 너머에서 건너온 이여. 신의 아들이 처녀의 배에서 났다는 신앙을 가진 이여. 그리고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포악한 이여. 그대 우리에게 감사하라. 모기보다 티끌보다 가치 없는 그대 남은 생명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에 우리 쓰고자 함이니.”


마리아가 다시 주문을 외우고, 사제는 앞서 추장에게 그랬듯 알론소의 옆구리를 갈랐다. 알론소의 몸집이 추장보다 커서인지 몸속을 헤집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이내 심장을 몸에서 뜯어냈다. 달을 향해 치켜세워진 알론소의 심장이 거세게 벌컥거렸다. 나는 마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과 함께 밤하늘에 달이 사라졌다. 횃불마저 느닷없는 돌풍에 꺼져버리고, 세상은 암흑 속에 빠졌다.





“태초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나무 씨앗을 먹고 키가 자라 거인족이 되었다. 52년의 주기가 13번 되풀이된 후에 재규어들이 나타나서 거인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그다음에는 재규어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자 태양은 꺼졌고, 세상은 멸망했다. 이때 한 쌍의 남자와 여자만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이어져 인류는 다시 번창했다. 두 번째 세상이 시작되었다.


52년의 주기가 13번 되풀이되었고, 이번에는 거센 바람이 사람과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바람이 너무 거세 사람들은 손과 발로 나무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때 꼬리가 생겨나, 사람들은 모두 원숭이가 되고 말았다. 태양마저 바람에 꺼져버리면서 세상은 멸망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두 사람이 바위에 의지하고 살아남았다. 이들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성했고, 세 번째 세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52년의 주기가 7번 반복된 후, 이번에는 화염의 비가 내렸다. 세상은 잿더미로 변하고, 인간들은 도망치다 칠면조로 변했고, 태양마저 하얗게 불타버렸다. 그렇게 세상은 또다시 멸망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역시 살아남아 네 번째 세상이 시작되었다.


52년의 주기가 12번 반복되고, 대홍수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 세상 사람들은 물고기가 되었고, 태양은 신이 내린 재앙에 두려워 신성한 모닥불 속으로 숨었다. 52년이 지나 물이 다 빠지자 숨어 있던 한 쌍의 부부가 밖으로 나왔는데, 이들은 태양도 숨은 세상에서 감히 불을 피워 신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신이 땅으로 내려와 부부를 벌하고, 지상에는 사람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네 번째 세상마저 끝이 났다.”


어느덧 마리아의 손에는 원정대의 강철검이 들려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몸으로 칼을 다루기 힘들었는지 처음에는 들고 있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괴어 놓았다. 그녀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번째 세상 이야기는 저번에 제가 알려드린 적이 있죠? 그렇게 다섯 번째로 생겨난 해와 달이 하늘을 지배하고 대지를 돌보아주고 있었건만, 52년의 주기가 7번 반복된 후 세상은 또다시 멸망할 때가 다가왔어요. 세상의 끝이 어느 계절에 오리라 계산을 마친 우리는 여섯 번째 새로운 태양이 태어났을 때 적들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많은 피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섬기는 도시인 텍스포코에 신께 바칠 희생자들을 보내라고 명령했지요. 그런데 그 저주받을 추장 놈이 명령을 거절하고 우리에게 맞섰어요. 텍스포코는 쉽게 함락되지 않고, 계속 멸망의 징조가 드러나는데 ‘붉은 꽃’으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우리는 점차 불안에 떨며 힘을 잃어갔습니다.”


마리아는 칼을 사제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목을 빼었다.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도 그녀의 음색은 변함없이 낭랑했다.


“그런 어려운 때에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어요. 당신이 이끌고 온 이방인 군대의 덕택으로 텍스포코는 함락되었고, 그 힘은 약해졌어요. 이제 우리는 그들을 죽여 그 심장을 새로운 태양께 바칠 수 있게 되었고… 당신네 말씀에 따르면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죠.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 거짓말한 것은 미안해요. 사실 난 거기에 살지도 않았고 노예도 아니었어요. 신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사제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쳤다. 마리아의 목이 잘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무것도 아닌 듯 사제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를 무심히 집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향해 던졌다. 머리는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달이 되었다.


여섯 번째 세상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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