巴黎, 巴士。

by 즈징

파리에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1시간 반 늦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짐을 찾고 공항 안에서 헤매느라 30분 정도를 소모했다. 4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정대로 2시에 파리에 도착했다면 공항에서 나오는 데 30분,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1시간 ― 대략 3시 30분에 에펠탑 도착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5시까지 문을 여는 앵발리드(Les Invalides, 파리의 군사 박물관 및 위인 묘지)에 들러 조금은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전날 내린 폭설 때문에 지연된 출국 시간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 시간, 그것도 두어 시간밖에 쓸 수 없는 남자 혼자 파리 시내에서 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에펠탑은 반짝였고 건물들은 고풍스러웠다. 관광지 근처에서 흑인들은 위압스레 싸구려 기념품들을 들이밀었고, 경찰들은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위험의 징후를 눈으로 좇았다. 아쉬운 마음에 몇 블록 걷고 나니 시간이 끝났다. 다음날 스페인으로 일찍 떠날 비행기를 무리 없이 타려면 늦지 않게 공항 옆 숙소로 가야 했다. 다시 한 번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북아프리카계로 보이는 무슬림 여성 둘과 어린이 둘, 백인 남성 한 명, 그리고 막연히 중국계일성 싶은 젊은 여자 하나가 나보다 먼저 타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가방을 내리고 지친 몸을 얹었다. 10여분 뒤 휴식시간을 마친 운전수가 버스를 몰고 공항으로 향했다. 하잘것없었던 파리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버스가 정상적으로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후 피로감이 몰려왔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 직후부터 계속 긴장하며 움직였는데, 하루의 끝이 보이자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졸아서는 안 되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게 되면 꽤나 일이 번거로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기를 쓰고 잠을 이겨보려 노력했다. 주위 눈치를 보며 손을 꼬집고,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어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갔다. 무슬림 꼬마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엄마가 옆의 친구(친척일는지도 모른다)와 나누고 있는 대화에 관심을 돌렸다. 백인 남성은 본국의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보스턴, 뉴욕 등의 지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미국인인 것 같았다.


다른 승객들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버스 뒤편에 앉은 여자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버스의 흔들림에 따라 몸이 이리저리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자못 우스운 광경이라 생각하고 눈을 중립적인 공간으로 돌렸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드리운 데다가 대부분 콘크리트 방벽으로 막혀 있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문득 든 생각. 저 여자도 혹시 나처럼 공항 근처 호텔로 가고 있는 중 아닐까. 그런데 피로감에 잠들어, 정류장을 놓치게 되면 그대로 종점인 공항 제2터미널까지 흘러들어가 난처하게 되는 것 아닐까. 깨워야겠다. 오지랖이야. 어쩌면 정말 종점까지 가려는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중에 기사가 깨워줄테니 걱정 없지 않은가. 괜히 내가 깨워서 단잠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항으로 직행한다기엔 캐리어도 없고 너무 간편한 차림인 것 같은데.


조금 더 고민하던 나는 무모한 짓을 벌이기로 했다. 뒷자리로 가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설픈 프랑스어로 몇 번 반복해 부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북경어보다 피치가 높은 것을 보니 대만인이나 홍콩인이겠거니 싶다.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는 듯해 영어로 바꾸어 부르자 그녀도 영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혹시나 호텔지구 정류장에 내리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어 깨웠다고 하자, 아직 잠에 덜 깨어 잠시 가만히 있던 그녀는 그제야 상황파악을 하고 당황스레 버스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다. 호텔지구까지 아직 멀었다고 말해주었고, 그녀는 안심했다. 내 말처럼 자신도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비행기로 파리를 뜬다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며 감사를 전했다.


상황이 정리된 이후에는 딱히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출신을 묻자 대만이라고 해서, 한국이라고 답했다. 내일 비행기로 스페인에 갈 것이라 내가 말하니, 여자는 조금 뜸을 들이다 자신은 대만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폰을 켜서 내일 일정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무엇인가 끄적였다. 여행 전부터 몇 번이고 확인한 일정이라 오래 볼 것은 없었다. 무슬림 일행은 계속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백인 친구는 여행 가이드북으로 보이는 조그만 책을 꺼내 읽는 중이었다. 무료해져서 다시 대만 여자에게 눈이 갔다. 꽤나 집중해 펜을 놀리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한창 꾸미고 싶을 나이이겠건만 화장은 가벼웠다. 차림은 가벼운 점퍼에 운동화를 신어 수수했다. 깔끔한 아가씨로군, 하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했다. 무엇에 대해 쓰고 있어요? 네? 그냥 이것저것요. 그렇군요. 나도 예전에는 글을 쓰곤 했어요. 공책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글을 써본 적이 있나요? 음, 많이는 아니지만요.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실연(失戀)한 사람에 대해 쓰고 있어요. 어떤 계절이 어울릴까요? 이어지는 침묵. 질문을 받은 것임을 겨우 알았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겨울이 당장 떠올랐지만 너무 진부하다. 가을도 쉬운 것 같다. 여름? 대담하긴 하지만 뒷받침할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의 시선이 간지럽게까지 느껴질 무렵 나는―


―봄이요.


여자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왜 봄이죠? 이번엔 내가 침묵했는데, 무슨 장난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말을 가다듬은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내가 자신을 골리고 있는 양 눈빛으로 압박해왔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봄은 돌아옴의 계절이에요. 따뜻한 바람, 푸른 이파리, 다채로운 꽃, 행복했던 추억까지도 돌아와요. 하지만 모든 것이 돌아온 자리에, 사랑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없어요. 그게 봄을 고른 이유에요. 혼자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 설명에 집중하느라 여자의 얼굴을 뒤늦게 보았다. 특별한 표정을 찾기 힘들었지만, 짙게 검은 눈썹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很有意思。


무슨 뜻이냐고 물었으나 여자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책으로 눈을 내리고, 무언가 글씨를 죽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극이 길고 부자연스러운 대화는 처음이라 숫제 의식 같이 느껴질 지경이다. 한참을 쓰던 여자는 내게 공책을 보여주었다. 오언절구(한 구가 다섯 글자로 된 절구)의 시였다. 한자 공부를 놓은 지 오래 되어 해석이 어려웠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읽어나갔다. 도리어 지난 봄을 생각하니 / 오래된 정원과 연못에는 꽃이 피었었지 / 넌 내게 예쁜 나뭇가지를 꺾어 달라 했었다 / 올해도 다시 꽃은 피었건만 / 멀리 떨어진 강변에 머물고 있네.


그러니까, 올해는 꺾은 가지를 받을 사람이 없군요. 여자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해했군요. 정말 맞아요. 좋은 시예요. 당신이 쓴 건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내 시는 아녜요. 시인의 나뭇가지를 받을 사람은 그의 딸이에요. 하지만 시가 쓰이기 1년 전에 병으로 죽었어요. 슬픈 이야기군요. 그렇죠. 당신이 봄을 택한 이유가 왠지 이 시의 정서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이렇게 처절한 이유로 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라도? 봄이면 전(前) 여친이 만들어준 소풍 도시락이 그리워요. 되게 맛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못 먹게 되었지요. 여자가 크게 웃었다. 하얀 이가 드러났다. 버스 안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부성(父性)이 맛있었던 도시락을 그리워하는 찌질함으로 급격한 위상 변화를 겪었다면, 그만큼 웃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후 여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사실 아직은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다음 여행지가 나와 같은 스페인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내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귀찮게 수작을 거는 것이라 생각해서, 거짓말을 하고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외국에서 처음 본 사람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말이 잘 통하는 것이 너무 재밌었다고 말했다. 잠시 나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스페인에서도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침묵. 이번에는 둘 다 침묵했다. 그녀는 할 말을 마치고 답을 기다리느라. 나는 상당히 당황하기도 했거니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에 어울리는 말을 급히 고르느라. 정말 힘든 찰나였지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떠올리자 할 말을 정할 수 있었다. 이번 파리 여행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나는 입을 열었다.

Moi aussi.


무슨 뜻이냐고 물었으나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