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려 읽는 첫 번째 글
쓰고 싶은 글: 서부극 - 그런데 사회주의 코뮌 이야기를 곁들인. 남/여 주인공 각 1명. 남자는 파리 코뮌의 생존자이며 미국으로 도피 후 수도사로 신분세탁. 여자는 남부 노예 출신이며 탐정기관의 정보원. 서부에서 일어나는 혁명 이야기. 써놓고 보니 재미없는 요소들 총집합 올스타전이네...
읽어야 하는 글: 프랑스 혁명사. 전쟁에 대한 여성의 시각이 묻어나는 책. 서부 개척사.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미국 흑인 노예 이야기. 5·18 등
한때 텔레비전에 내가 좋아하는 정유미가 주연을 맡는 드라마로 나온다 해서 처음 이름을 접했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라고 하더라. 책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니고 특히 한국 소설 쪽은 더더욱 몰라서…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독서모임에서 한번 읽어보자고 오퍼가 있긴 했는데 다른 책에 밀렸다. 그렇게 내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러다 이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다. 작년에 나는 어떤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고, 첫 모임에 참여하는 날 좀 긴장한 상태였다. 뭐, 그냥 아마추어들이 서로 쓴 글에 대해 덕담 좀 해주는 그 정도의 모임이지만. 그때 한 사람을 만났다. 그분도 나처럼 모임에 처음 나온 것이었다.
모임이 시작되고 우선 내가 쓴 글을 사람들이 읽었다. 그때 나는 하루가 잘 풀리지 않는 어떤 직장인의 일상에 대해 짧은 글을 썼는데, 글을 쓰면서 친구의 경험담을 반영했다. 당시 친구는 직장에서 비슷한 직급의 여성 동료가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너무 히스테리를 부려 힘들어했다. 그의 푸념을 들어주며 대충 그 동료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를 알았고, 설정을 어느 정도 변경해서 글에 넣었다.
넣고 보니, 글에 필요한 갈등 상황에 딱 어울리는 빌런이 되었다. 글을 쓴 나도 다시 읽어보니 짜증이 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걱정이 되었다. 빌런에 여성만 있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 모임에 나가면 여자분들도 있을 건데. 그래서 나름 밸런스를 맞춘다고 글의 후반 결정적 부분에는 남자 빌런을 넣었다. 만취해서 카페에 들어와 알바생에게 민망하게 추근대는 인물로. 그러다 이를 말리려는 주인공 일행과 싸움이 붙는다. 이제 밸런스가 맞겠다고 생각했다.
내 글을 읽고 나서 사람들의 감상평이 이어졌다.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가운데 그분이 여자 빌런 부분을 지적하고 들어왔다. 나와 같이 뉴비인데 세게 나오는 걸 보니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 부분은 공격을 받지 않을까 이미 생각은 해둔 상태였기에 그럭저럭 받아쳤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적당히 버무린 거지, 쌩판 여성을 혐오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리고 뒤에 보면 이 여성 빌런만큼 문제를 일으키는 남성 빌런도 있다고.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얘기했다. 두 빌런이 작품 내에서 일으키는 갈등 양상 묘사가 너무 다르다고. 앞에서 여성 빌런이 직장에서 일으키는 갈등은 매우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고, 이 여성을 혐오해달라고 그런 속성을 몰아준 것 같다. 그런데 뒤에 남성 빌런과 다투는 것은 양상이 다르다. 서로 치고받고 더 심한 갈등인데도 싸우는 모습 묘사가 다소 유머러스하지 않으냐. ‘와, 진짜 여기까지 생각한단 말야?’ 싶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받아쳤다. 이후로 그분은 다른 회원들의 글에도 날이 선 비평을 이어갔고, 모임의 분위기는 매우 나빠졌다.
다음 달 글쓰기 모임에는 내가 사정이 있어 안 나갔는데, 뒤에 들어보니 그때는 모임장과 그분 딱 두 명만 나왔다고 한다. 그분은 자기가 이 모임의 성격을 잘못 알고 왔다며 사과를 하며 나갔다. 그나마 나는 다른 회원들보다는 그분의 말에 반박을 많이 하고 어깃장을 좀 놓았기 때문에 속은 편한 편이다. 그런데 그분의 태클은 인상이 깊게 남았다. ‘여성 캐릭터를 활용할 때 어떤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가’에 대해 추가적인 경종을 울려준 느낌이랄까.
이후 5~6페이지 정도의 단편 소설을 두 번 더 썼다. 작가의 한계로 둘 다 남자 주인공 이야기였다. 여성 캐릭터들에게 좀 더 신경 쓰긴 했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두 편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 ‘도구적’이었다. 분량을 많이 먹든 적게 먹든 그들은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고, 그들이 행동하게 된 내면 심리 표현이 거의 없었다. 자신이 없긴 했다. 예전에 내가 한 말처럼,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고 싶었는데 막상 읽는이의 눈에는 여자의 가죽을 뒤집어쓴 아저씨가 보일’ 것 같아서. 다들 경험하지 않았나. 남자 작가가 묘사하는 여자 캐릭터의 기괴함과, 반대로 여자 작가가 묘사한 남자 캐릭터의 참사를.
그래서 여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여성 캐릭터를 보려고… 일단 여성 작가의 글을 읽으려고 한다. 맨 처음 생각한 책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였다. 그런데 작가분이 노벨상 타고 나서 도서관에 책이 잘 안 계시더라고. 그래서 다른 책을 떠올리다 기얶에 떠오른 것이 바로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책 감상평을 하기 전에 서론이 너무 길었네.
감상평: 솔직히, 되게 밋밋하다. 나무위키는 이 책을 드라마, 판타지,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해두었다.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드라마로도 판타지로도 미스터리로도 모두 큰 자극을 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내가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인지, 아니면 책의 진면목을 제대로 못 본 것인지.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판타지와 미스터리 쪽이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남자에다 남성향 판타지에 익숙해서 그런 거 아닐까. 책에서 판타지적인 부분은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활약하는 퇴마사 안은영, 그리고 안은영의 퇴마 활동에 도움을 주는 한문 선생 홍인표의 에너지, 그리고 나쁜 기운의 영향으로 온갖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사립 M고 정도. 재밌게 본 판타지로 [눈물을 마시는 새], [반지의 제왕], [룬의 아이들] 등 세상이 무너지고 음모가 횡행하고 신적 존재도 나와주는 것들을 주로 읽은 나로서는 좀… 약했다. 맨 마지막에 학교에서 봉인 해제된 용과 싸우는 게 제일 격한 액션이었는데, 이것도 무표정 무감각하게 읽었다.
그렇다고 작품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냥, 나는 타깃 독자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사람이고 책이고 없으니까. 나는 이 책에서 여성 작가의 부분을 챙겨 가면 되는 것이다.
배울 점: 되게 ‘따뜻한 판타지’? 앞서 얘기했듯 나는 우직쾅쾅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판타지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 데에서는 나라가 나오고, 정치가 나오고, 영웅이 나오고, 위대한 업적이 나온다. [안은영]은 그렇지 않다. 무대가 M고 밖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등장인물도 학생, 선생 정도. 마지막 챕터의 용을 설령 안은영이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라와 세상이 멸망할 각은 안 보인다.
대신 은영이 어렸을 때 미끄럼틀을 타다 죽은 어린애 귀신이 나오고, 크레인 사고로 죽었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은영의 친구 귀신이 나오며, 교과서 선정 관련으로 교장과 대립하는 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심심할 수는 있지만, 세상을 파멸시킬 마왕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우리 곁에 실제로 있는 이야기다. 놀이기구 안전사고, 공사장 안전사고, 그리고 직장 애환. 작가는 이 친숙한 소재에 귀신을 섞는다. 무슨 마라 맛이 나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맛이 난다. 음… 미역국 맛이 난다. 국간장, 마늘, 참기름 맛은 모두가 알지. 그렇다고 미역국이 쉬운 게 아냐. 좋은 미역 줄기를 골라서 오랫동안 푹 끓이는 정성이 있어야지. 이 책에서 배울 점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이야기에 애정을 가지고 미역 줄기처럼 글의 소재와 주제 삼아 끓이면서, 자신의 글솜씨를 조미료 칠 정성.
이게 여성 작가들의 공통점일까, 아니면 정세랑 작가만의 독특함일까. 당장은 잘 모르겠다. 앞으로 다른 여성 작가들의 글을 더 많이 읽어봐야지.
여성 캐릭터 관련: …솔직히 별거 없는데? 작품 속 묘사된 남자 캐릭터들이 좀 오글거린다는 생각은 들긴 했지만, 여자 캐릭터들은 정말 특별히 남자와 다르게 행동하는 게 없었다. 인터넷에서 누가 그러드만. ‘그냥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캐릭터 구상하고 행동하게 한 다음에, 그 캐릭터를 여성이라고 하라’고. 맞는 말인 거 같다. ‘여자 캐릭터라면 뭔가 남자랑 다르게 묘사해야 해’라고 지레 겁먹은 것은 아닐까. 쉽게 생각하면 되는 일을 괜히 혼자서 어렵게 돌아간 것 같다.
다른 여성 작가들의 책을 더 봐야 분명해지긴 하겠지만, 배운 게 없음에도 한 수 배운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