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려 읽는 다섯 번째 글
쓰고 싶은 글: 서부극 - 그런데 사회주의 코뮌 이야기를 곁들인. 남/여 주인공 각 1명. 남자는 파리 코뮌의 생존자이며 미국으로 도피 후 수도사로 신분세탁. 여자는 남부 노예 출신이며 탐정기관의 정보원. 서부에서 일어나는 혁명 이야기. 써놓고 보니 재미없는 요소들 총집합 올스타전이네…
읽어야 하는 글: 프랑스 혁명사. 전쟁에 대한 여성의 시각이 묻어나는 책. 서부 개척사.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미국 흑인 노예 이야기. 5·18 등
1. 군대에 있을 때 자주 읽었던 잡지가 있었다. 그 잡지는 매월 뒤 페이지에 의상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여성분들의 사진을 많이 실어줘서 대대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힙스터스런 예술 칼럼도 종종 실리곤 했는데, 다른 이야기는 이제는 다 까먹고 어떤 예술가의 일화 하나만 기억난다. 그의 전시회에 후배 한 명이 와서 감상하고는, ‘작품들이 대중 영합적이다’라고 비판을 했다. 예술가가 어느 정도 인정을 하며 후배에게 너는 이와 같은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물으니, 후배가 이렇게 대답했단다. “저는 대중과 타협하지 않거든요.”
2. 2020년 비디오게임 업계에서는 대형 신작이 나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대단히 뛰어난 완성도로 막대한 판매 수익을 거둔 작품의 속편이었다. 1편의 성공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남자’가 ‘소녀’와 우연히 동행하며 가까워지고, 뒤에 ‘소녀’를 지키기 위해 대의까지 희생한다. '부성애'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코드였고 게이머들은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속편에서 기획자는 보편성을 버리고 ‘증오’와 ‘용서’라는 새로운 주제를 시도했다. 전작의 ‘남자’는 초반부에서 처참하게 죽고, ‘소녀’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기 파괴적으로 싸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복수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물러난다. 기획자의 의도는 게이머들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새로운 주제를 좋아한 게이머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포기하는 수양딸의 스토리에 실망했다.
3. 책 감상평을 쓰겠다면서, 시작부터 갑자기 미니멀리즘이니 비디오게임이니 늘어놓으며 부산한 시작이 되어버렸다. 이들을 굳이 한자리에 모은 이유는, 이번에 이승우 작가의 책 《지상의 노래》를 읽으며 나는 도대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생각을 다시 해보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고민을 하려 이 책을 고른 것은 아니었다. 연재 앞에 명시했듯 나는 ‘웨스턴+코뮌’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 하고, 서부에 들어설 혁명적인 공동체를 묘사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주인공이 수도사 신분으로 위장하니, 이 공동체에 종교적 색채를 약간 섞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래서 참고할 만한 소규모 종교 공동체 주제의 책을 찾다 보니, 지인이 이 책을 강력 추천했다. 운 좋게도 지역 도서관에 책이 있어 쉽게 대여할 수 있었고, 퇴근하고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스토리는 매우 재밌었고 내 취향이었다. 문제는 문체였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가 지향하는 문체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계속 걸리다 보니, 꼭 이 책뿐만 아니라 내가 이전에 작가의 스타일과 개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기억들이 같이 떠올랐다. 잡지에서 읽은 당돌한 후배 이야기부터, 새로운 주제를 시도한 기획자까지. 서로 동떨어진 경험들이 어수선하게나마 ‘작가 개성에 대한 고민’이라는 같은 궤도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 책을 통해 내가 그 궤도에 다시 올라섰음을 느꼈다.
“이승우”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 분 알고 보니 대단한 분이었다.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데뷔. 대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까지. 내가 읽은 책도 2013년 동인문학상을 탄 작품이었다. 게다가 해외에 많이 알려진 분이라니. 이런 귀하신 분을 몰라뵙고, 지인에게 작가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물었었네. 이름이 무난한 탓으로…….
《지상의 노래》는 천산 수도원 벽서(壁書)의 정체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천산 수도원은 한 여행 작가의 유고가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본 교회 강사가 발굴에 나서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다만 강사가 수도원에서 일어난 비극적 진실에 대해 전부 알려주지 못하는 것을, 작가는 두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한 명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소년이며, 다른 한 명은 상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너무도 다르지만, 모두 나름대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수도원에 들어온 둘. 이 둘과 강사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벽서의 진실이 끝에 밝혀진다.
작가의 학력을 보니 서울신학대 졸업-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중퇴. 이런 배경에서 종교적 고찰을 오래 한 것인지, 책 전체에서 종교적 색채가 묻어난다. 한국 작가가 이렇게 기독교를 소재로 깊이 있게 쓴 책은 처음 보았기에, 그 깊이를 느끼자마자 나는 스토리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작품의 중요 장면마다 거기에 걸맞은 성경 장면과 구절이 나오는 것에 연신 감탄했다. 나도 기독교를 소재로 한 글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깊이가 상식선 정도거나 서양사를 혼자 읽어보며 얻은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쓸 글에 종교적 색채를 맛깔나게 담고 싶다면, 이 정도 내공은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글의 구조도 매력적이었다. 이 책의 주제는 ‘이어받기’였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들은 진실을 밝혀낼/벽서를 그려낼 임무를 차례대로 이어받는다. 이렇게 되면 누구는 주인공이고 누구는 부차적 조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명을 띤 주요 인물이 된다. 작중 수도원에서 그러했듯 ‘동등한 형제’가 된다. 쓸 글에서 누구는 메인이고, 나머지는 서브야 정해두고 넘어가는 데 익숙했는데, 이런 식으로 여러 인물에게 서사를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일회성 캐릭터에게는 좀 미안했거든. 가상의 인물이라도 자기 몫을 챙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항상 재미를 느끼고 배울 점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앞서 밝힌 대로, 작가의 문체가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나는 담담하고 번잡하지 않은 문장 스타일을 좋아한다. 일부 문장을 쓸 때 다소 길어진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시쳇말도 ‘뇌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승우 작가는… 정말 이 사람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문장·문단이 길었고, 중첩과 반복을 계속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버스에 앉아있다가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작가는 이 사건이 매우 우연히 일어났지만, 그것이 정말 우연일지 의심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앞에서 네 번째 오른편 복도 쪽 좌석에 앉았고,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보았고, 순간 이런 시골에서 이런 여자를 보다니 하고 놀랐고, 자기의 놀람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 더 훔쳐보았고,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말을 붙였다. 다른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은 다른 자리에 앉을 확률과 같았고 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을 확률 역시 다른 자리에 앉지 않을 확률과 같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미리 결정한 것이 없었고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결정한 것이 없고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주의자라면 우연한 부딪침이나 막연한 행동 속에서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은 동기를 찾아낼 것이다.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은 동기를 찾아낼 것이다.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도 않은 동기를 숨기기 위해 우연과 막연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기 싫은 물건은 '우연히' 손에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기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약속은 '우연히' 잊어버린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 이 사건이 워낙 작중에서 큰 영향을 끼치므로 이런 독특한 기법을 썼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런 표현 방식이 책에서 계속된다. 심지어는 등장인물이 말하는 큰따옴표 대사까지.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작가 미친 것 같아.’ 처음에는 그래도 매력을 느끼려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뒤에 가서는 문단이 어디서 끝나는지 확인하고 뛰어넘기를 계속했다. 이래서야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엔 힘들겠군, 하고 생각했다.
책을 중간 정도 읽었을 때, 추천해준 지인을 만났다. 그에게 정말 재밌는 책이라며 감사하면서도, 길고 번잡한 문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분 문장이 정말 쉽지가 않죠. 한국에서 만연체? 중문 쪽으로 유명하신 작가예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읽을 수는 있게 해놔야지. 이건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이런 건 좀 별로였다고 말했다. “그게 그 작가분 책 매력이에요. 그런 문장 좋아하시는 분들이 되게 많아요.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내려가다 보면 얼마나 의미가 깊고 재밌는데요.” ‘이 양반 뭘 모르시네’ 하는 눈빛으로 지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예술계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술 감각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예술은 작품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평가받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 사실은 작가에게 고난을 선사한다. 작가의 시각과 대중의 시각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으므로. 작가가 자신만의 발상으로 작품을 만들어놓으면, 대중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혹평을 내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번에는 내가 혹평을 내리는 대중이 되었고.
그렇다고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그들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데 치중할 것인가. 이는 작가의 프라이드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다. 남의 눈치를 받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의 방식으로 실체화한다. 이런 작가들에게서 대중들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많으면서도, 이러한 '작가주의'를 인정받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속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엔 힘들겠군’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책이란 결국 널리 읽히는 게 좋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나는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야’라고 자기 방어기제를 이미 깔아놨지만, 그럼에도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의 평이 신경 쓰이고, 가끔은 두렵기까지 했다. ‘20~30년 전 책에 있는 글을 읽는 기분이야. 문장이 너무 길어. 가독성도 떨어지고.’ ‘기법이 오히려 전달하려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솔직히, 계속 같은 부분에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이런 비평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표정 밑 얼굴 근육을 긴장시키기도 했거니와, 내가 글쓰기를 잘못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작가의 문체에 혹평을 하면서, 그리고 지인에게 한 소리 들으면서, 어느새 앞서 말한 ‘궤도’ 위에 올라서 있었다. 글을 열심히 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햇병아리 수준임은 분명하다. 고쳐야 할 부분들이 많을 거고. 하지만 사람들의 평을 모두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지적들을 다 반영해 내 문장과 문체를 바꾸면, 나는 더 나은 글쟁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는 중에, 책의 끝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독자를 향해 남긴 말이 내게 다가왔다.
한때 독자들은 내게 실체가 없는 추상이었습니다. 나는 오로지 나를 향해 소설을 쓴다고, 내가 유일한 내 독자라고 오만하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요즘은 내 책을 읽는 누군가의 얼굴을 때때로 그려 봅니다. 내 책을 읽다니, 읽어주다니! 그 사람이 참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늙어서 그런 건가, 하고 거울을 보기도 합니다. 외로움이 무서워졌나, 아니면 외로움과 싸우기가 귀찮아졌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합니다. 무서움이든 귀찮음이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독자는 나와 아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가 나 같습니다. 결국 같은 유전자밖에 끌어들이지 못한 셈이니 섭섭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닮은, 나와 같은 독자와 함께 이 벅찬 세상을 계속 잘 읽어 나가고 싶습니다. 두루두루 고맙습니다.
이 글을 읽자 어느 정도 머리가 명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너무 많은… 어쩌면 모든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런 대작가님의 글에도 함부로 입을 대고……. 갑자기 죄송스럽네. 그런데, 꼭 독자 모두를 만족시켜야 할까? 작가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자가 자신과 아주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닮은, 자신을 닮은 독자와 함께 이 벅찬 세상을 계속 잘 읽어나가고 싶다고.
그래,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나는 나와 닮은 얼굴을 한 독자 정도만 찾아도 되지 않을까. 그들과 함께 계속 잘 읽어나가기만 해도 자랑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글쓰기 전체적인 개선과 발전은 계속해야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분명히 하고 더 예리하게 가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괜히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뭉툭한 펜이 되지 말 것. 나와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폐부를 흥미롭게 찔러 들어갈 날카로운 펜이 될 것.
내 글에 반영할 점:
☞ 종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
☞ ‘이어받기’ 구조에 관해 연구
☞ 독자를 고려하되, 타협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