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 Oct 10. 2023

넌 특별한 밥이야

wave to earth

  오늘 아침 일어나 어젯밤 지어 놓고 잠들었던 밥을 확인했다. 침대에서 주방까지는 4걸음 정도면 되는데, 그 짧은 사이 취사가 아닌 보온을 누른 사실이 떠올랐다. 문득 이 사실이 떠오른 이유는 지난번에도 같은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어젯밤 밥 냄새가 안 나더라니... 신경질적으로 뚜껑을 여니 밤새 뜨끈하게 지진 쌀알들이 퉁퉁 불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밥이 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밥을 한 번 뒤집자, 쌀 알갱이들이 폭력적으로 튀어 날아갔다. 사방은 어지럽고 밥은 안 되어 있고. 빨리 밥을 먹고 밀린 일들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퉁퉁 불은 쌀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버려야 하나. 그러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마음도 불편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에라 모르겠다, 물을 조금 붓고 쾌속취사를 눌렀다. 10분 만에 끝난 밥솥 안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밥이 존재했다. 가장 아래에는 질은 밥, 그 위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밥, 제일 위에는 조금 설익은 밥. 아무렇게나 눌러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 한 밥을 먹어야 했지만, 일단 짜증은 뒤로 미뤄 놓고 싶어 얼려둔 떡을 해동했다. 떡을 먹으며 빠더너스의 콘텐츠 중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를 봤다. 문상훈은 도가니 수육 세트를 시켜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동안 쓰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써 내려간 글의 내용이 누군가도 똑같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감기에 걸리듯이 삶에서 겪어내는 고통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들을 글로 쓰니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고.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런 글이 필요하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웃긴 해프닝이었을 잘못한 밥이 이토록 짜증 났던 이유는 마음이 평소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이 애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숙련된 전문가조차 자신의 실력을 의심할 테지만, 나는 그저 뻔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누구나 그랬고, 다 괜찮아진다고.

  

  보온을 누른 것은 실수이다. 실수를 품은 쌀알들은 퉁퉁 불어 있었다. 답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일단 물을 붓고 다시 취사를 누르니 밥이 되었다. 질은 밥, 나름대로 괜찮은 밥, 설익은 밥이 공존했지만 어찌 되었건 밥은 밥이다. 심지어 사연 있는 밥이 되었다.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에 세 가지의 식감을 가진 특별함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한다. 실수는 무언가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애매한 사람인 나는 실수투성이인 나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으로 실수로 보온을 누르더라도 특별한 밥을 보며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넌 지금부터 특별한 밥이 되는 거야.”라고.  

작가의 이전글 휘둘리고 휘말리고 휘청거리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