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끄고릴라 Feb 28. 2023

나르 엄마 밑에서 살아남기.

더 이상 부모의 정서적 먹잇감으로 살고 싶지 않아 졌다.




나의 부모가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르 부모님 아래서 자란 외동딸은


의지할 형제자매 없이


오로지 홀로 두 분의 나르적 양육방식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마흔이 되어 처음 알게 된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


한국어로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이다.




어디서부터 이 절박한 '외로움'이 


오는 건지 궁금했고,


많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갈등 상황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온통 밖으로만 쏠려있었던 관심을


내 안으로 돌리면서 


나를 알아갔고


내 부모님을 알아갔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부분의 결핍으로 인해


생겨난 방어기제이며


생존본능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말고도 나처럼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노트북을 켜고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나르 부모님의 특징


나의 경험에 비추어 정리해 보겠다.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조건적인 사랑'이다.



자신이 만족할 때에만 자녀에게 반응하는 부모.


아이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매의 눈으로 쏘아보고 비난과 질타를 쏟아붓는다.


인정과 수용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오직 공부를 잘하거나 학교에서 임원이 


되어야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자녀는 자신 그대로를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게 되고


낮은 자존감과 수치심, 죄책감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부모님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높은 기준을 삼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언제나 결과는 '자책'으로 돌린다.


나는 늘 '함량 미달'인 셈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고


그저 부모의 가치를 검증해 주는 수단으로 삼는다. 


집 밖에서는 아이가 자신의 자랑거리여야만 하고


대외적인 자랑거리로 만들기 위해


집 안에서 엄격한 규율과 잣대로


아이를 깎아내리고 채찍질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칭찬하는 듯 보이지만


집에 돌아와서의 모습은 그 반대였기 때문에


그런 부모님의 태도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세 번째 특징은


'자신은 지극히 감정적이면서


자녀의 감정은 무시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반항적일 때


불같이 화를 내고 감정 조절을 못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숨겼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부모님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집안이 다 망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셨기 때문에...




나의 감정을 조종하고 통제하는데


전문가이신 부모님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감정을 스스로 억압하는 것뿐이었다.





네 번째 특징은


'자녀가 부모를 의존하게 만든다'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누가 정답을 이야기해 주기만 한다면


그대로 정말 잘 따라 할 자신은 있다.


살면서 언제나 부모님이


나의 인생을 결정해 주고 코치해 주셨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 증후군에 빠진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가장 기본적인 감각 기능을 제거해 버렸다.


그것이 자식 된 도리인 줄 알았다.


어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나의 자율성은 언제나 침해당했고


'자아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삶의 주인인 '나'는 없고


오직 부모에게 조종당하는 대로,


가스라이팅 당하는 대로,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나'만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나도 나르 부모님 아래서 자란 것 같다고


느껴지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그동안 너무 애썼고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복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그 회복의 여정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문득문득 길을 걷다가도


과거의 어린 내가 떠올라서


눈이 붓도록 한참을 울기도 한다.


최대한 회복의 속도는 느리게 하자.




그동안 지친 나 자신을 보듬어주자.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만남의


영역을 넓혀가자.




부모님이 앞으로 변화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받아들이고


그분들과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자.




진짜 나를 알아가고


공허한 가슴의 빈자리를


조금씩 메워가자.








어제 엄마는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셨다.


나르 엄마의 주된 무기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나의 위로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일부러 요즘 엄마와의 전화 통화나


카톡을 줄여가고 있었다.


어릴 때는 하루에 기본 5통은


전화를 했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카톡을 보내는 정도이다.




여기에 엄마는 서운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달라졌다.


나르시시스트의 전략이 무엇인지


파악했고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동안 너무 많이 아팠기 때문에...


더 이상 먹잇감으로 살 수는 없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가정의 '아내'이다.


나의 아이들에게만큼은


나르 부모와 똑같이


건강하지 못한 사랑을 흘려보낼 수 없다.




이를 악물고 


여린 마음을 부여잡고


엄마에게 톡을 보냈다.









이제부터는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다.


거리를 두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할 수 있어서 불안함을 느꼈는데


가까이에 두어야 할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은


분별을 하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부모이기 때문에


관계를 단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병들어가면서까지


고통스러운 관계를 계속하는 건 아니다.




내 마음이 편한 선 안에서


용기를 내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도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위로가 되고픈 

'부끄 고릴라'였다.






작가의 이전글 사실은 나도 '아동학대 가해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