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이 없던 시절
1990년대 초.
내가 살던 동네가 가난했는지,
아니면 그 시절이 원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국민학교를 다니는 내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친구는 없었고,
겨울방학마다 스키장에 다녀오는 아이는
할아버지 때부터 꽤 잘 산다는
구의원네 집 아들 하나뿐이었다.
겨울이었는데도
그 아이의 얼굴은 고글을 낀 자국만 남긴 채
유난히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눈 위로 반사된 햇빛이
겨울에도 사람의 피부를 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를 특별히 동경하지도,
대놓고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속으로 조금 부러웠을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 만큼
우리는 스키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곳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미디어라고는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전부였고,
아이들이 보는 프로그램 속에는
스키장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부러워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눈앞의 붕어빵이나 귤, 호떡이 더 좋았고
백원짜리 몇 개로 살 수 있는
떡볶이와 오뎅,
연탄불에 구운 쫀드기가 더 절실했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이스스케이트장에 가서
컵라면을 먹는 일이
그 나이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기쁨이었다.
별것이 없어도
우리는 잘 놀았고,
박탈감 같은 말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다세대 주택의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든,
마당 있는 2층집에
네 식구가 살든
아이들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다르게 보지는 않았다.
열 살이 넘으면
방 한 칸에 네다섯 명이 사는 일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걸
알 법도 했을 텐데,
그 시절의 우리는
그저
빨간 집, 노란 집, 초록 집처럼
각자 다른 색깔의 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비교할 줄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