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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Oct 28. 2022

베이킹은 내 운명

빵을 굽는 느긋한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


유년기에 잠시 말레이시아 페락 Perak주 이포 Ipoh에서 산 뉴요커 앤드류 티오 Andrew Teoh는 에디토리얼과 인터랙 션 디자인, 기업 브랜딩까지 아우르는 전방위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다. 20대 동안 오롯이 커리어를 위해 쉼 없이 달리던 그가 팬데믹을 계기로 베이킹을 시작했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매주 성실하게 빵과 케이크를 구웠다. 그 시간은 30대가 된 자신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발견하는 날들이기도 했다. 





집이 포토제닉 하다. 미니멀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참 좋다. 

작년에 여자 친구와 이사 온 집이다. 나는 정리를 잘하고 여자 친구는 청소를 좋아해서 합이 잘 맞는다. 둘 다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보니 어느 정도 서로의 라이프스타 일과 취향을 반영한 것 같다. 때마침 우리 층에만 복층 구조 공간이 있어서 이곳을 홈 오피스로 쓰고 있다. 


울프 올린스 Wolff Olins, 레드 앤틀러 Red Antler 등 유명 광고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고, 스눕 독의 요리 책의 디자인도 총괄하며 활발히 활동해 왔다. 요즘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나? 

현재는 구글 이 벤트 앤 익스피리언스 Events and Experiences 팀과 일하면서 매번 다른 주제와 콘셉트의 라이브 이벤트 디자인을 맡고 있다. 보통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일이 들어와서 그 기간에는 일반 회사원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한다. 팬데믹 이후에는 완전히 재택근무 구조로 바뀌어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엄격히 시간을 맞춰 일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계기가 뭔가? 

어릴 때부터 항상 그림을 그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한 수업에서 가상 광고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광고주를 설득하고 새로운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일이 꽤 재미있었다. 때마침 담임선생님도 그래픽 디자인과 광고 전공 쪽으로 진로를 추천하셔서 그 두 분야 모두 유명한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s)로 진학하게 됐다. 학교에 다니면서 창작하는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어 그래픽 디자이 너로 진로를 결정했다. 그 후 2000년부터 12년간 쭉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해왔다.




지금까지 커리어를 쌓아오면서 프리랜서로만 일한 점이 눈에 띈다. 

졸업 후에 이커머스 웹 디자인 회사인 허시 디지털 Hush Digital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실험적인 인터랙티브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곳에서 다른 프리랜서 디 자이 너를 많이 만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처음에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일을 하면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전에 일하던 동료가 새로운 프로젝트에 나를 추천하면서 점점 다양한 일을 맡게 됐다. 한 광고 회사에서는 프리랜서로 3년째 일하던 무렵에 정규직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정규직을 희망하는데, 프리랜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질 수 있고, 매번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를 골라서 진행할 수 있는 점 그리고 또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여자 친구와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얼마 전에도 몇 주간 서울에 다녀왔다. 이런 점 때문에 말 그대로 영원한 프리랜서인 파마랜서 permalancer(장기 계약직)가 되길 자청한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분야라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프로젝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궁금하다. 

여러 프로젝트를 완수했는데 그중에서 우버 Uber 리브랜딩 프로젝 특가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스눕 독의 요리 책 프로젝트는 그에 반해 아주 소규모로 진행하다 보니 일하는 과정이 많이 달랐다. 여자 친구와 공동으로 디자인 부문을 총괄해 진행한 프로젝트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담당 에디터를 통해 소통하다 보니 정작 스눕 독과 직접 이야기해보진 못했지만.(웃음)




팬데믹 이후 일도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일은 당연히 줄었고, 일상도 심심해졌다. 팬데믹 이전에는 매주 부모님과 차이나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새로운 레스토랑을 찾아다니거나 소규모 콘서트나 갤러리에 가곤 했다. 요즘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예전 같지 않은 건 확실하다. 또 팬데믹 이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드러나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친절’과 ‘선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프로젝트를 선별할 때나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낼 때 긍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최우선으로 두게 됐다.


팬데믹 기간 동안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베이킹을 시작했다. 향초 만들기, 반려식물 기르기 등 다양한 취미가 있을 텐데 베이킹을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미식가는 아니지만, 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디저트 마니아다. 스팀 번 같은 적당히 달콤한 아시아의 디저트는 물론 초콜릿 케이크와 빵도 좋아한다. 부모님이 중국 음식점을 운 영하셔서 어릴 때부터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함께 감사하며 나눠 먹는 분위기에 익숙하다. 베이킹을 시작한 직접적인 이유는 팬데믹 기간 동안 본 넷플릭스의 아마추어 베이킹 쇼 <그레이트 브리티시 베이크 오프 The Great British Bake Off> 때문이다. 내 성격이 꼼꼼하고 인내심도 있는 데다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 잘할 것 같다는, 같이 쇼를 본 여자 친구 말에 시작하게 됐다.


처음 만든 빵은 무엇이었나? 

바나나빵이었다. 제일 간단해 보이는 레시피를 고른 것이었다. 두 번째 베이킹은 친 구들과 함께하는 연말 파티를 위해 구운 레몬 라벤더 케이크. 여자 친구의 전 직장인 <뉴요커 The New Yorker>에서 사내 베이킹 대회를 연 적이 있다. 각자 구운 다양한 종류의 빵, 케이크, 쿠키 등을 가져오는 자그마한 이벤트였는데, 그때 말차 쿠키를 구워 보냈다. 반칙이긴 하지만.(웃음) 당시에 전체 3등을 했다. 그때도 그렇고, 내가 만든 빵을 먹은 사람들의 반응을 전해 들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동기부여가 된다. 내가 소심하고 나 자신에게 혹독한 스타 일인데, 베이킹이 ‘자신감 부스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레시피는 어디서 참고하나? 

대부분 구글에서 검색하거나 그때그때 유튜브를 참고한다. 다이애나 헨리 Diana Henry의 요리 책 <Simple>은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인데, 베이킹을 시작할 때 많이 참고했다. 책 이름처럼 간단한 요리 재료로 베이킹뿐 아니라 다양한 메인 요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볼 수 있어서 바이블처럼 애용한다. 다른 하나는 킹 아서 베이킹 King Arthur Baking이라는 사이트인데, 원래 밀가루로 유명한 브랜드다. 사이트에 다양한 레시피와 온 라인 포럼이 마련돼 있어서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시도한 베이킹도 엿보고, 애피타이저 아이디어, 오븐 관리법 등 꿀팁도 얻는다.


가장 자신 있고 또 좋아하는 베이킹 메뉴가 있다면? 

단연코 빵이다. 밀가루, 물, 소금 등 최소한의 재료만 가지고 맛을 내야 하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빵을 굽기 시작했을 땐 이스트 빵만 만들었는데, 요즘은 유산균 특유의 시큼한 향이 감칠맛을 돋우는 사워도우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발효종이 잘 크고 있는지 수시로 지켜봐야 하고, 잘 부풀었는지 상태도 확인해야 해서 공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애정도 생기고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시간 관리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오늘 준비한 사워도우 로프도 한 3일 걸렸다. 요즘은 포카치아에 꽂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워도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방 만들 수 있어 직접 키운 허브도 얹어 자주 구워보고 있다.


반대로 만들기 까다로운 메뉴가 있다면? 

케이크의 프로스팅 과정이나 파이를 바삭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다. 너무 두껍거나 건조해서 완벽한 상태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이런 부분이 도전 의식을 북돋우기도 한다. 친구들의 기호에 따라 글루텐 프리 빵을 만들기도 하고 기존 레시피에서 설탕을 확 줄여 케이크를 굽기도 했다. 거의 실험하는 수준이지만(웃음) 베이킹 자체가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점, 아직도 공부할 부분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 좋다.


 


베이킹이란 취미를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 듯하다. 베이킹을 하며 새롭게 얻은 것이 있다면 뭔가? 

맞다. 베이킹 덕분에 부족했던 자신감도 채우고,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면서 내 손으로 직접 반죽을 치대고 갓 구운 빵의 온도를 느끼며 맛보는 모든 감각이 새롭다. 그래픽 디자인 일도 좋아하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가치니 까. 베이킹하는 동안은 어느 때보다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점도 좋다. 또 좀 더 능동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어본 게 언제지?’ 싶어서 직접 샌드위치 로프를 만들고, 팬데믹 기간 동안 아시안 마켓에 가기 힘들 어 일본식 식빵을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먹었던 식전 빵이나 디저트를 기억해 집에서 최 대한 그 맛을 재현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빵을 굽는 것 같다.


빵 굽기에 이렇게 진심인데, 비즈니스로 연계할 생각은 없나? 당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빵 배달은 브루클린 한정’이 란 답글도 봤다. 

하하, 사실 그건 친구와 나눈 농담이다. 팬데믹 때 워낙 빵을 자주 굽기도 했고, 또 동네 친구들 얼굴을 볼 겸 빵이 나 쿠키를 가져가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실 나만의 베이커리를 열고 싶은 꿈이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을 살려 이름부터 로고 디자인, 인테리어, 빵과 디저트, 음료까지 다 내 손으로 만 들고 싶다. 매일 아침 일어나 성실히 빵을 굽고 가게를 단장하고. 그래서 여행을 가거나 동네를 다닐 때도 카페나 베이커리를 먼저 찾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또 내가 얼마나 절실한지 아직 지켜보는 중이다.


미래의 당신 소유 베이커리에서 딱 다섯 가지 메뉴만 만든다면? 

어휴,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내가 무척 좋아하는 폭신한 우유 빵, 나만의 레시피로 만든 과일 타르트,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워도우 로프, 일본의 유명 베 이 카레 ‘하브스 HARBS’를 능가하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그리고 레몬 마들렌.




좋아하는 베이커리는?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고 빌리브 베이커리 Go Believe Bakery’. 이름이 좀 우스운 곳이지 만 여기서 스팀 번을 종종 사 먹는다. 집에서 20~30분 거리의 ‘사라기나 베이커리 Saraghina Bakery’는 바로 옆에 피 자 전문점도 같이 운영하는 곳인데, 주로 갓 구운 바게트나 참깨 빵을 사러 간다. 그리고 코리아타운의 뚜레쥬르, 파리바게트도 빵과 케이크 종류가 무척 다양해 근처에 가면 항상 들른다.


현재 인생에서 베이킹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온전히 나 자신과 보내는 시간. 2020년부터 나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빵과 케이크를 마음껏 만들고,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나만의 소박한 세계 가 열린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종종 있지만, 그 어떤 때보다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많이 느낀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20대를 쉬지 않고 내달려 만든 그래픽 디자이너로 서 내 모습도 좋지만, 나 자신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베이킹이 주는 기쁨은 또 다른 차원이다.





Andrew Theo @andrew_teoh 

Editor @_formiro

Photographer @andrewchalence 


This Interview is for <SERIES> magazine Fall/Winter 2022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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