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Sep 17. 2021

빈티지는 살아있다

살아남은 물건들이 우리의 오늘을 빛낸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본 규슈 출신의 도예가 다케다 시노 Takeda Shino는 지인들 사이에서 빈티지 마니아로 유명하다. 브루클린 베드 스터이 Bed-Stuy에 위치한 그의 로프트는 1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취향의 박물관이 되었다. 모로코와 인도, 터키산 카펫과 쿠션, 아마존 야노마미 Yanomami 부족의 밀짚 바구니, 1980년대 붐박스 스타일의 카세트테이프 리코더, 그가 손수 만든 세라믹 타일을 조립한 티 테이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도 프라이빗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실의 아트 피스 등 시선 닿은 곳마다 사연 없는 물건이 없다. 이 집 물건들의 나이는 평균  50세가 넘는다.  




집을 채운 물건들이 굉장히 다채로우면서 조화롭다. 어디서 이런 물건들을 구하나? 

보통 친구들이 이사 가면서 주거나 내 취향을 아는 주위 사람들이 선물한다. 전남편의 고모님이 앤티크 제품 수집가라 그분께 많이 물려받았다.  한 번은 내가 빈티지 제품을 좋아하는 걸 아시고는 첼시의 당신 창고에 초대해 뭐든 가져가라고 하셨다. 내가 몇가지 실버 웨어를 집었는데, “아유, 시노야, 좋은 눈을 가졌구나! 근데 그건 내가 아끼는 물건이라 안 된단다”라고 하시던 게 기억난다.(웃음) 내 옷은 대부분 온오프라인으로 구한 빈티지 제품이거나 디자이너 친구들이 만든 것이다.  


괜찮은 빈티지 제품을 구하는 노하우가 있나?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나의 빈티지는 198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미니멀한 디자인보다 양감이 있고 자유로운 스타일을 좋아한다. 한 두 가지 색에 한정하지 않고 무지갯빛, 갖가지 색을 고른다. 빈티지 숍에서 아주 예쁜 물건을 발견했더라도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엔 단호히 내려놓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아니까 쇼핑하는데 10분이면 충분하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 전통 세라믹과 예술작품을 수집했다고 들었다. 본인의 확고한 취향은 그분들에게 물려받은 것인가?

어머니는 엄격한 일본어 교사이셨고, 직접 뵌 적 없는 할아버지는 검사이셨다. 두 분 다 미술을 지극히 사랑하셨는데, 특히 할아버지는 앤티크 접시 수집이 취미였다고 들었다. 내 이름도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본 전통 세라믹 스타일 중 하나인 시노유志野釉에서 딴 것이다. 보통 하얀색 글레이즈에 불에 그은 듯한 붉은 자국과 공기방울 같은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릴 때부터 저녁 준비를 마친 어머니는 항상 내게 어떤 접시에 음식을 담을지 골라보게 하셨고, 현관문 근처엔 사시사철 도자기 화병에 꽃이 꽂혀 있거나 일본 전통 서예 작품, 향 등이 놓여 있어 자연스럽게 이것들을 보며 자랐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취향을 반영한 것지만,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아름답고 전통적인 것에 대한 미감을 키울 수 있었다. 또 3시간씩 차를 몰아 유명한 메밀국수를 먹으러 가거나, 계획 없이 불쑥 새벽 4시에 일어나 다 같이 일출을 보러 가는 등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감사하는 환경에서 자란 점도 내 취향과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스무 살 때 연고도 없는 뉴욕으로 훌쩍 날아왔다. 이후 10년간 ‘블루리본 스시’에서 매니저로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예가로 데뷔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친한 친구 셋이 한 해에 모두 갑작스러운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 그 힘든 시간이 인생은 짧고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로 느껴졌다. 항상 하고 싶던 일을 이제라도 시작해야겠다 싶었고 그때 메탈과 유리, 세라믹을 떠올렸다. 그날이 2010년 8월 1일로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었다.  메탈과 유리는 불을 직접 써야 하고, 또 한순간에 작품의 성패가 결정되는 점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라믹을 선택했다. 마침 일본인 도예가가 진행하는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한 날을 시작으로 2년 뒤부터는 풀타임 아티스트로 살게 됐다.  





규슈에서도, 뉴욕에서도 도예를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특유의 스타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시대가 맞아 떨어진 것 같다. 당시는 뉴욕에서 브루클린 아티스트, 수공예, 여성 작가 등이 각광받던 때였다. 소비자 사이에서 1990년대에 대량 생산한 제품보다는 이야기가 깃들거나 감동을 주는 물건을 원하는 욕구가 커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  당시 서구권에서 ‘재패니스’라는 점은 호감을 사는 요소였다. 나는 스스로 반은 일본인, 반은 뉴요커라고 생각한다.  내 작품에도 규슈에서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일본 전통의 아름다움에 뉴욕이란 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 다양성,  에너지 등이 더해져 있다. 그런데 사실 도예가라는 거창한 타이틀도, 저명한 아트 페어에 나가는 일도 큰 의미가 없다. 내가 뵌 적 없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접시들을 뉴욕에 가져와 쓰고 있듯이 수많은 내 작품 중 하나라도 세계 어딘 가에서 누군가의 대를 이어 혹은 빈티지 시장을 돌고 돌아 계속 쓰인다면 그만큼 값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본인이 빈티지를 사랑하게 된 이유인가? 

맞다. 이케아 제품 빼고 집 안의 거의 모든 물건이 빈티지이거나 그런 무드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실크 셔츠도 빈티지인데 광택이 나는 옷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이 테이블도 다리가 부러졌었는데, 아티스트 친구가 석고로 캐스팅한 발 모양의 이 우스꽝스러운 다리를 달아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가 수집하신 투박하기 그지없는, 4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그릇에는 주전부리를 담아 놓는다. 빈티지 제품과 식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  





집에 빼곡히 자리한 빈티지 물건 중에서 가장 아끼는 건 뭔가? 

항상 변한다.(웃음) 요즘은 세라믹 젓가락 홀더를 제일 좋아한다. 이밖에는 디자이너 친구들이 만들어준 옷과 킨츠기金継ぎ 제품들. 나는 초반에 동서양의 앤티크 그릇을 복원하는 킨츠기 작업을 했다. 아름답고 완벽하게 깨진 조각들을 찾아 헤매고, 오랜 시간 공들여 작업한 후 금으로 마무리하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킨츠기 제품들은 절대 저렴하지 않다. 그럼에도 새 접시를 사지 않고 킨츠기 작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물건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준 것이거나 어떤 특별한 기억이 담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 제품을 아끼는 마음이 시킨 일이다. 직접 만든 이 킨츠기 술잔들은 내가 술을 잘 못해서 자주 쓸 일은 없지만, 대신 이 잔에 술을 담아 친구들에게 권한다. 


어떻게 이 많은 제품을 관리하고 청소하나? 

딱히 안 한다.(웃음) 오늘처럼 인터뷰가 잡히거나 친구들이 놀러 올 때 손걸레로 닦는다. 이 테이블의 긁힌 자국도 대부분 내가 만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장 사포질해야 할 일일 테지만, 나는 이런 흠도 물건을 본래 용도로 ‘잘’ 쓰면서 자연스럽게 더해지는 영광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소파 옆 나무 의자도 자세히 보면 온통 스크래치 투성이다. 세상을 떠난 반려묘가 발톱으로 긁은 자국인데, 고양이의 본성이 그러니 마음껏 긁게 놔두었다. 지금은 저 의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됐다. 





단골 빈티지 숍은? 

윌리엄스버그의 ‘마더 오브 정크 Mother of Junk’. 가구, 키친웨어, 조명, LP판 등 그야말로 수천 가지 ‘정크(!)’ 중에서 눈에 불을 켜고 나만의 보석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옷은 보통 캐나다 온라인 스토어에서 구입하는데, 빈티지 옷을 사랑하는 부부가 운영하는 우리 동네 가게 ‘해럴드 앤 모드 빈티지 Harold and Maude  Vintage’도 애용한다.  


빈티지의 매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어떤 것이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마치 우리 개개인처럼. 어떤 물건은 작은 흠집이나 오래된 느낌 때문에 외면당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시간의 흔적을 품은 유일무이한 물건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살아남은 오래된 물건을 요긴하게 쓸 수 있으니 물건 그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 환경보호에 일조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Photographer Andrew Chalence 

Editor Summer Jeong 

@Bed-stuy, Brooklyn, New York 


SERIES MAGAZINE FALL/WINTER 20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