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랑이 안성댁.
에잉, 쯧 쯧.. 또 기집년이네, 또 기집년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셋째 딸이 태어나던 날,
곰방대에 꽁초를 붙여 태우며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은 안성댁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연신 큰기침만
흠, 흠, 해댔다. 그러다가 괜히 한 번씩 윗목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쓰잘데기 없는 기집년이나 펑 펑
낳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미가 잘 먹지 못한 탓에 갓 태어난 핏덩이는
커다란 눈만 휑-하니 삐쩍 마른 데다 새카만게
볼 품이라곤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을 내리 낳은 건 아니었으나 첫아들의 짧은 생을 끝으로 줄줄이 딸만 셋을 낳은 탓에 숨소리도 죽이고 사는 존재였다.
밥만 축내는 입 하나 더 늘린 죄의식에 산간은 커녕,
며칠 앓은 감기처럼 툭 툭 털고 일어나 다니던 아교공장에 다시 나가야만 했다.
꼬장꼬장한 안성댁은 윗목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핏덩일 훌렁훌렁 넘어 다니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쌍스런 욕으로 궁시렁궁시렁 하루를 보냈다.
2대 독자로 뼛속 깊이 외로움을 느끼며 자란 명숙아비가 허허거리며 셋째 딸을 안고 좋아했으나 안성댁의 사나운 눈초리를 피해 가며 그런 웃음도
흘릴 수 있었다.
서럽게 세상을 맞이한 셋째 딸이 있는 듯 없는 듯,
온갖 구박과 설움을 다 겪으며 두어해 가 지나자
3대 독자 영식이 태어났다.
방문에 새끼줄을 꼬아 맨 빨간 고추의 임자는 안성댁의 아주 특별난 손주였는데 눈 뜨고 못 봐줄 만큼의 유난을 떨었다.
명숙이네 자매들은 어린 나이에도 그런 할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터를 잘 팔아 남동생 보았다는
이유로 경숙에게 향한 욕설이 조금 줄어들 무렵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참새떼는 늘어가면서 좋은
성격만큼이나 좋아하는 술로 인해 번번이 일자리를
짤린 명숙아비는 나날이 주정뱅이가 되어 갔다.
중매쟁이가 들고 왔던 사진 속의 훤칠한 인물에
더없이 좋아 보이는 성격이며 근본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에 끌려 명숙네를 선뜻 내주었는데
빼도 박도 못할 화근덩어리였다.
안성댁보다 더한 욕을 퍼붓다 못해 마냥 사람 좋을 것 같던 성격은 손찌검도 불사했다.
젖은 솜덩이 같은 몸을 이끌며 아교 공장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명숙네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모자간에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며 딸들을 헐뜯는 일이었다.
없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명숙네 자신을 흉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터질세라 영식을 향한 안성댁의 집착은 세 자매를 더욱 서럽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은 나날이 더 하찮고 초라한 천덕꾸러기가 되어 갈 뿐이었다.
내리 딸만 셋을 낳은 명숙네에게도 영식은 살갑고
귀한 존재였으나 안성댁의 손에서 떠날새가 없다 보니
맘 놓고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그런 것을 서운해하면서도 손 귀한 집안의 금싸라기
손주에 대한 애착이려니 하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첫아들이 두 돌도 채 넘기지 못하고 급체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강구책도 세우지 못했던 시간을 떠올리다 보면 두 위인이 한없이 괘씸했지만
가슴에 맺힌 한으로 남겨야만 했다.
꾸엑거리며 토하고 뒹구는 자식 앞에서 애비라는 작자는 그저 안절부절이었고 그 아이라면 벌벌
떨며 죽는시늉까지도 감수하던 안성댁은 겁에 질린
채, 윗목에서 홀깃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새끼 건사도 제대로 못해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책임을
뒤집어 씌운 욕지거리에 치를 떨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떠난 아이의 빈자리를 구박과 설움으로 견뎌내며 수년만에 태어난 귀하디 귀한 손주이다
보니 안성댁의 기고만장 유별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어느 이른 저녁, 영식을 둘러업고 둥가둥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서성이던 안성댁을 향해 지나가던 스님이 시주 좀 하라며 말을 건넸다.
시주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시주타령이냐 호통을 치자
씁쓰레한 표정의 젊은 스님이 머뭇거리며 말 끝을 흐렸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다. 보아하니 귀한 손인 것 같은데
서른 고비를 넘기기가 힘들겠네 그려..
그런 고약한 소리를 허투루 넘길 리 없는 안성댁의
고약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썩어 문드러질 놈의 땡중이 어디서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거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말고 냉큼 꺼지기나 하슈...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나무관세음보살을 찾았고
안성댁은 재수 없다며 소금을 옴팡지게 뿌려댔다.
그 광경을 보던 명숙네가 바가지에 보리쌀을 한 움큼 담아 부리나케 뒤를 쫓았으나 젊은 스님은
바람같이 사라진 뒤였다.
사는 게 악몽의 연속인 가운데 주정에 지치고 삶에 찌든 명숙네가 철물점에서 외상으로 산 에프킬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궁안산 자락에서 목을 매었다.
그녀가 축 늘어진 시체처럼 철물점 주인에게 업혀
오던 날, 안성댁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낮은 천장을 뚫고 끝없이 퍼져나갔다;
에구, 육시럴... 곱게 처 죽던가 하지 남사스럽게
목은 메고 지럴이여, 지랄이..
궁핍한 살림에도 생전 남에게 아쉬운 소리조차 못하던
명숙네가 에프킬라를 외상으로 사 들고 터덜거리며 산을 향해 가는 것이 불안해 뒤를 쫓았다고 했다.
하지만 죽을 사람 구해다 살려 놓은 것조차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안성댁의 포악이 극에 달하는 것을 보며 철물점 주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옆에서 커다란 눈만 껌벅이던 명숙아비는 잠시
무슨 생각인지 하는가 싶더니 그 길로 뛰쳐나가 날이 훤히 밝은 후 에야 꾀죄죄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안성댁은 십수 년 만의 상봉이라도
하는지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불쌍한 놈... 하며
연신 눈물을 흘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고만고만한 천덕꾸러기들은 그 어린 눈에도 할머니가 몹시 미웠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향한 원망만 커져갔다.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만큼인 수원 유지의 귀한 딸로 유모에 머슴까지 부리던 금지옥엽 어린 시절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주정뱅이 남편에 욕쟁이 시에미가 등 떠밀어 보내는 동냥질의 친정나들이가 죽기보다 싫었으나 줄줄이 딸린 어린 새끼들을 생각하면 체면 불구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생긴 순서대로 벼슬을 하자면 최고 자리에 거뜬히 앉고도 남았을 만큼 훤한 인물의 남편이 그런 날엔
한없이 자상한 웃음을 지었고 호랑이 안성댁은 함박꽃이 되어 손수 저녁상을 차렸다.
시집 온 이후 ,제대로 차려진 밥상에 익숙하지 못한 명숙네는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심정으로 꼬깃꼬깃 접은 보자기만 방바닥으로 내팽개치듯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천덕꾸러기들과 더불어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바가지 밥을 긁는 게 훨씬
더 편하고 좋았다.
암팡진 입으로 방안의 사람들을 향해 도끼눈을 뜨는 명숙과는 달리 뚜~한 모습으로 순하게 눈치만 보는 정숙이 더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위, 아래로 치이며 자란 탓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살이 통달 한 것 같은 표정의 경숙을 볼 때면
에구 저 간뎅이도 큰 년...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울기는커녕,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 하며 희번덕거리는 것이 애 답지 않아 어떤 때는 저걸 정말 내가 낳은 자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섬찟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리 아롱이다롱이라고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통에 무섭기까지 했다.
지 성질대로 호도독거리며 까탈을 부리거나 마냥 순한 것도 아니면서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쯤 들어앉았을 것만 같은 그 애의 속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새끼줄 꼬아 맨 빨간 고추의 임자가 두 살 되던 해에 다시 또 딸이 태어나자 안성댁은 아예 대놓고 말끝마다 구박을 일삼았다.
에이잉,쯧쯧...기집년이 모자라 또 보태는거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
구박이나 욕설에 넌덜머리가 날 만큼 익숙해진 명숙네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털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나 몸은 천근만근 쇳덩어리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저녁,
명숙아비의 일상이 되어버린 주정과 이유도 모르는 매 타작으로 인해 세 자매는 달밤에 숨바꼭질하듯 동네를 들뛰다 어느 집 처마밑에 나란히 숨어있었다.
낮은 스레트 지붕 밑의 낡아빠진 내복차림인 천덕꾸러기들은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비웃듯이 달빛은 휘엉청 슬프도록 밝았다.
앞 개울가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명숙아비의 섬찟하리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섞일 무렵 삐걱거리는 다리 저 끝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
명숙아아~~정숙아아~어디 있니 우리, 예쁜 공주님들.
순하디 순한 정숙은 너무도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와앙 터지려는 걸 꾹 꾹 참으며 한 손은 언니에게. 또 한 손은 동생에게 맡겼다.
그런 중에도 명숙이 둘째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소리를 냈고 울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의 정숙이
언니, 무서워... 할 때쯤 시커먼 그림자가 세상 더 없을 인자한 표정으로 앞을 턱 막아섰다.
달빛에 비친 자상한 그 웃음은 악마의 웃음처럽 보였고 세 딸을 향해 구슬리는 그 말은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한 사탕발림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끄억거리는 동시에 양 팔을 크게 벌리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버지 흉내를 냈다.
"아이고, 우리 이쁜 딸 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술에 취해 껄껄거리는 모습은 잔뜩 겁에 질린 어린 자매들을 더욱 오그라들게 만들 뿐이었다.
"왜들 이러고 있어, 끄으윽...
아비가 안 때릴테니 어여 가자, 끄어억..."
커다란 손아귀에 움켜 잡힌 채 그 길로 끌려들어간 명숙은 맏이라는 이유로 몽둥이 찜질을 당했고,
둘째는 애비버리고 언니 따라 도망갔다는 이유로 얻어터졌다.
"이런 이런,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리 셋째 딸,
딸꾹 딸꾹, 끄어어억. 넌 터를 잘 팔아 남동생 봤으니
애비가 특별히 봐줬다 까짓꺼.
우리 셋째 딸을 이 담에 어떤 복 터진 놈이 데려가려나...
연신 끅끅거리며 여섯살짜리에게 가당치도 않은 말을 쏟아내던 아비는 윗 목의 간난쟁이를 들여다 보더니 밤톨만 한 게 고거 참 야무지게도 생겼네...
하며 껄껄거렸다.
아랫목에서 영식을 끌어안고 있던 안성댁이 기집년 백날 들여다봐야 뭐 나올 게 있느냐며 이불자락 펄럭이는 것으로 불편함을 내색했다.
펄펄 끓는 곳에서 몸을 지지며 자리보존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의 산모는 아궁이 옆에 쭈구리고 앉아
아이구, 이 년의 팔자야..소리만 되내었다.
들릴 듯 말 듯한 혼자 소리에도 귀는 어찌나 밝은지 안성댁이 대뜸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아니, 누가 저 더러 기집년이나 처 낳으라고 했어!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이나 펑펑 낳은 위인이
얻다 대고 팔자타령은 하는 게야..."
말 끝마다 그놈의 기집년, 기집년...
무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에 무슨 웃을 일이 있다고
큭큭대는 정숙이 못마땅했는지 명숙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며 면박을 주었다.
"넌 참 속이 없는 건지, 한심한 건지. 그게 웃을 일이냐".
애꿎은 매 타작도 억울하고 분한 데다 성질대로 하자면
누구든 걸리는 대로 머리라도 다 쥐어뜯을 판국이었는데 그 대상이 순둥이 정숙이란 것에 더 화가 치밀었다.
소리 안 나는 총 이라도 있다면 마구 휘갈겨 버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아랫목에 누워 험한 소리나 지껄이는 안성댁에게 명중되길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도 화가 났고 여지껏 훌쩍이는 명숙네의 흐느낌에 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