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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Mar 24. 2024

#2.    주정뱅이 아버지.         

도망 다니는 일상.



고고하고 깐깐한 안성댁의 남편은 일제 강점기하에 여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낡은 풍금옆에서 찍은 신식양복 차림에 안경을 쓴 모습이  점잖기 이를 데 없었다.

나란히 앉은 쪽진 머리의 안성댁 역시 곱상하고 음전한 모습이었으나 얄팍한 입매며 대나무 쪽 같은 성미가 사진에서도 고대로 드러났다.

포마드 기름을 발라 가르마를 넘긴 대여섯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꼬마신사 차림으로 가운데 끼어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모양 좋은 시절이었다.

손 귀한 집에 무럭무럭 자라던 사내아이가 소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비가 급살을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곱디고운 안방마님이었던 안성댁의   처지는 졸지에   청상과부로 전락을 했다.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알아버린 사내아이는 동구밖에서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리움부터 배우며 헛헛한 나날을 보냈다.

좋은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일찌감치 세상을 등진 아비로 인해 그들 모자에게 남은 것은 마음 한의 가슴 저림과 툭 건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악에 받친 오기뿐이었다.

사진 속의 부러운 시절은 아득한 기억 속의 빛바랜 과거에 불가했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넋 빠진 모습으로 수절을 해 온 안성댁에게 너그러움을 바란다면 그건 아마도 당해보지 못한 자의 욕심일 것

같았다.


아교공장 일이 줄어들자 돌산에서 돌을 나르는 일을 시작한 명숙네는 행색이 점점 나빠 마치 중환자

처럼 보였다.

고작 5학년 짜리 명숙이 맏이라는 서글픔을  담아 어미의 변도를  챙기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 어린 눈에도 고된 인생의 어미모습이 얼마나

가엾고  불쌍했던지 감자라도 몇 알 생기는 날엔  그것을 삶아 쪼개어 밥에  박아서는 경숙의 손에

들려 보냈다.

돌산  중간쯤  지날 무렵  철없는 경숙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는 몰래 변도뚜껑을 열고 감자를 꼭 두 개만 빼먹었다.

나머지는 엄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다 꺼내먹는 양심 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포실포실한 그 맛은 입안의 혀만큼이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움푹 파인 자리 대로의 변도를 받아 든 명숙네는 나머지 감자를 다시 경숙의 입에 넣어주며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커다란 눈만 껌이며 엄마를 바라보던 경숙은 그까짓 거  먹고  체할거나 있냐 하는 욕심에 멀건 김치 몇 조각 있지도 않은 보리밥을 넘보기 일쑤였다.

로 돌아온 후, 감자 빼먹은 변도얘기를 하던 명숙네의 얼굴에서는 함박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경숙이란 년 심부름시켜야 구멍 숭숭 뚫린 변도

가져오더라.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다 빼먹지 않았던데... 그런 짓까지도 기특하고 이쁜지 소리 내어 웃던 그 순간만큼은  안성댁을 잠나마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뿌역뿌역 먹는 자식들의 입을 보며

그 구멍이 뭐라고 그리 죄다 쏟아넣느냐흐뭇한 소리를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다.

좋은 것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어미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고 정말 못 먹는 음식이거나  아니면 진짜 배가 불러서 안 먹는 줄 알았던 어리석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자 온순하고 곱상하던 명숙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찌든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악다구니만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 남매에게 향한 애틋함은 더 깊이  쌓여

무슨 날이라도 되면 세심하게 챙겨며 행복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밀가루에 이스트를 잔뜩 넣어 주먹보다 더 크게 부풀린 빵은 특별한 간식거리는데 그것을 싸들고 남산계단을 오르거나 벚꽃놀이를 갈 때면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식들에게 하는 것과는 반대로 무능력한 남편에

대한 욕설과 삿대질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안성댁과의 잦은 대거리도 서슴지 않았고 지지리 복도 없는 년 서방 잘못 만나 허구한 날 요 모 꼴로 산다는 푸념이 그치질 않았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세간을 깨부수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겁대가리도 없이 밤새 주정을 해대는 명숙아비에게 집주인이 매몰차게  방 뺄 것을 요구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애꿎은 꽁초만 뻐금거리는 술 깬 후의 모습은 줏대라곤 없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그럴 때면 의례히 선한 눈빛이 되어서는 명숙네를

살살 구슬렸다.

이봐, 어떻게 얘기 좀 잘해 봐. 이사할 처지는 못 되고 아이고 그놈의 술이, 원수여 웬수..

예전 같으면  다소곳이 듣고는 손발이 닳도록 빌고 또 빌며 사정했을 테지만 이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대책도 없는 인간이 허구한 날 그놈에 술은 퍼마시고 날더러 뭘 어쩌라고.   차라리 술독에 빠져 뒈져 버리던가. 으이그 지지리도 박복한  이년에 팔자야.

어떤 해결책을 바란 건 아니었으나 한 수 더 떠가며 악다구니 치는 모습이 볼썽 사나웠던지 벙구석에 처박혀 눈치만 살피던 안성댁이  방문이 부서져라

세게 열어 끼며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저런, 귀신이 물어가다 놓칠 년,

,기집년들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기 싫으면 가 빌기라도 해야지 얻다 대고 껑거리 솟음이여.

육시랄년 같으니라고...

막힘도 없이 좔나오는 어마무시한 욕이 끝남과 동시에  남루한 옷보따리를 봉당에 내동댕이 치자 그것을 본 명숙네가 발로 휙 걷어차며  어깃장을 놓았다. 뭐 변변한 거나 있다고 보따리까지 던져주긴...

내가 이 집구석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면  성을 갈아버릴 테다... 금숙을 휘딱 들쳐업은 명숙네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영식이 손을 꿰차고는 그 길로 쏜살같이 집을 나섰다.  삐죽거리며 새카만 손톱을 물어뜯던 경숙이 엄마..하고 부르며  쫓아갔으나 못 들은 척 걸음만 더 빨라졌다.

눈앞에서 어미의 모습을 놓친 경숙은 눈물로 온 동네를 쏘다니다 컴컴해서야 집이라고 찾아들었다.

호롱불 밑에  머리를 맞댄 아비와 안성댁의 대화는

쳐 죽일 년 다시는 내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한다는 치사 하고 졸렬한 내용이었는데 마치 좋은 얘기라도 나누는 듯이 두런두런 다정해 보였다.

명숙과 정숙이 윗목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고픔에 지친 경숙이 밥 얘길 꺼낼  처지도 아니었다. 슬그머니 두  언니가   일어서며 툭 치는 것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해주었다.

머뭇거리며 문고리를 잡는 세 자매의 에 안성댁이

기를 박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우라질 년들 , 자빠져  자지 않고, 오밤중에 어딜 까질러나가는 거야 , 에잉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

쩌렁쩌렁한 소리가 안성댁의 꼬장꼬장한 모습을 대변하듯 담을 타고 넘어 가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욕설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자매들은 명숙이 몰래 뭉쳐놓은 맹탕의 주먹밥을 눈물로 베어 먹으며 이를 갈았다.

언니, 이제 우리 엄마 안 오는 거야?

 우리 버리고 도망갔나 봐

당장 며칠 후면 어미도 없이 입학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경숙이 딱했던지 명숙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경숙아, 걱정하 말어. 너  학교 갈 때쯤이면  엄마

올 거야.  순하게 생긴 커다란 눈을 불안하게 굴리 정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경숙아 ,언니 말이 맞아 엄만 꼭 올 거야 .

명숙이 달아수건 내려다보 결국 혼자 입학식을 치른 경숙은 엄마아빠의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이 마냥 부러웠다.

비록 혼자였으나  하루하루 학교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며  당찬 성격 고대로 , 또래들보다 훨씬 더 의젓해졌다.

집에서 듣던 안성댁의 구박과 욕설이 없어 훨 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외롭고 낯설었지만 경숙에게 있어 학교라는 공간은 어린 동심의 탈출구였다.


새로 이사 한 종암동 개울가 옆의 판잣집은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그것 또한 안성댁의 욕설 대상이었다.

"우라질 놈의  천장은  만들다 만 것도 아니고  사람은 서서 드나들게 해야  할 것 아녀, 이런 육사랄

허리 꼬부라져 지레 죽게 생겼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수시로 지껄이는 욕에 닥지닥지 붙은 네 가구의 사람들이 비닐 친 문을  열고는 빼꼼 내다보기 일쑤였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개울가에서 놀던 명숙의 검정 고무신이 떠내려 가던 날,  안성댁의 공치사가 밤새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우라질 년, 힘들게 주워다 신겨 놨더니만 그것도 간수 못 해  떠내려 보내고 지랄이여 ,지랄은...

찾아오기 전 에는 맨발로 다닐 각오해.

눈 뻘게 또 주우러 다니게 하지 말고,

에잉,  들 떨어진 년 같으니라구...

신발을 찾기 위해  훠이훠이 개울가를 뒤지던 명숙은 마치 절름발이처럼 한쪽 발을 쩔뚝거리며 걸었다.

보다 못한 뒷방의 새댁이 낡은 고무신을 내 주었는데

그것을 얻어 신은 명숙이 길 가다  동무라도 만나는 날엔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었다.

행여 누가 그 크고 낡은 고무신을  쳐다보기라도 할까 봐 작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발 보다  훨씬 큰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도 한쪽 고무신을 항상 꼭 손에  쥐고 다녔다.

나중에라도 혹시 나타날지 모르는  다른 한쪽에 대한 기대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동네에 상여라도 지나는 날의 명숙네 자매들은 끝까지 쫓아가는 악착을 떨며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상여 구경이 목적은 아니었고,  그 날 만큼은 떡 부스러기며 산자도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정말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멀고 먼 망자의 길을  하염없이 쫒았다.

부잣집으로 갓 시집온 새댁이 일 년도 채 못 살고 죽었는데  그날은 마치 동네 거렁뱅이들의 잔치 날 같았다. 마지막 가는 길의 베풂으로  인한 후한 인심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덕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텅 빈 마음까지 뿌듯하게 채워질 때쯤이면 누군가가 죽는 일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흉흉한 생각마저 들었다.

다 늦은 저녁에 돌아온 세 자매를 향해 날아든 것은

안성댁의 구정물 세례와 더불어 그것보다 더 구질구질한 욕 세례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에게 푸짐한 욕 뿐만 아니라 고약스럽고 못된 별명도 하나씩 붙여주었다.

명숙에게는 앙칼진 여우라 했고 , 정숙은 그저 허허 거릴 줄만 아는 것이 속도 밸도 없는 칠뜨기라 놀렸으며

경숙은 속을 알 수 없는 응큼한 늑대 같은 년,

그리고 막내 금숙은 참기름 독에 빠졌다 나온 미꾸라지 같은 년 이라고 말 끝마다 놀렸다.

제 스스로 지어 놓은 별명에 흡족해하며 혼자 큭큭 거리는 모습은  마치 동화에나 나오는 아주 고약스런

마귀할멈처럼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리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찌 보면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붙여 준 별명대로 성격이 보이는

것이 그냥 헛된 소리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소나무 밭에서 다방구 놀이를 하던 정숙이 하얀 꽃잎처럼 힘 없이 떨어지는 걸 목격한 경숙은 그 자리에

 멍 하니 서 있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으나 경숙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소나무 끝 만 쳐다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느릿느릿 불려 나온 안성댁은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는 정숙을 향해 대뜸 욕부터 퍼부었다.

"기집년이 가랭이 일그적거리며 나무엔 뭐 하러 기어 올라 가  이 꼴이여.  내 이년의 다리몽댕일 분질러 놓을테다.. 하며 길길이 뛰었다.

그 판국에 분질러야 할 것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정숙의

가느다란 다리였다는 사실에 경숙이 악을 쓰며 죽기 살기로 대들었다.

늘  해 온 습관처럼 아비의 저녁 밥상머리에  턱 받치고

앉아  오늘 일을 고자질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할머닌 언니가 불쌍하지도 않어? 죽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난 차라리 할머니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어. 귀신은 뭐 하고 있나 몰라, 저런 할머니나 잡아가지.. 으어어 엉...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얼른 지옥불에나 떨어지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명색이 할머니라고 차마 그렇게 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여간해선 울지도 않아 독한 년 소리를 듣던 경숙이

꺼이꺼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던 안성댁이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소리쳤다.

"육시랄 년,  니 에미라도 죽었냐?  별것도 아닌 일로 통곡은 하고 지랄이여. 바소고리 같은 입 닥치지 못해?

이 년 죽으려거든 너나 죽어라 애꿎은  지 할미를 왜

끌어다 부쳐. 이 처 죽일 년.


밥상머리에서 안성댁의 고자질을 전해 들은 아비는 그렇지  않아도 허연 얼굴에 도화지보다 더 흰 빚이 되어  누워 있는 정숙이 잘못될까 싶었던지

 이런저런 말이 없었다.

수심 가득한 표정이 되어 에미도 없는 판국에

아이구, 불쌍한 것..하며 중얼거렸으나  그깟 기집년

쥐뿔이나 불쌍하냐는 안성댁의 고함에 잠시 주춤했다.

이마와 손을 번갈아 가며 떡 주무르듯이 짚어 보는 눈 빚이 어찌나 애절하고 따뜻해 보이던지 명숙과 경숙이

숨소리도 못 낼 지경이었다.

할머니가 대신 죽으라며 길길이 뛰던 경숙의 방자함이

그대로 묵살되는 것이 배가 아팠던지 안성댁의 못 마땅한 표정이 '육시랄 년 두고 보자, 는 고약을 떨며 째리고 또 째렸다.

고자질  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바짝 약이 올라 있는 안성댁을 향해 경숙이  혀를 쏙 내밀었다.

"저...저 귀신이 물어 가다 놓칠 년, 하는 짓거리 하고는.. 내 저 년의 뱀 같은 혓바닥을 잘라버릴까 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것에 펄펄 뛰다 까무러치든 말든 그깢 것쯤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분에  못 이겨 펄쩍거리다  경끼하는 명숙에게 못된 성깔머리가 딱 니 할미 닮았단 소리를 자주 들었던 터라

약 오른 나머지 그 김에 뒤로 넘어가 죽었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했다.

맥없이 시름시름 앓던 정숙은 보름이 지나서야 맹~한

모습으로 일어나 혼자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정말

칠뜨기 같았다.

핑계김에 긴  친정 나들이를 끝낸 명숙네는 제법 살이 오른 편안한 모습이 되어 모셔오다 시피 남편 손에 이끌려 왔다.

명숙이  장마통에  신발 떠내려 갔던 얘기며, 정숙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침이

마르도록 하던 안성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명숙네가 꺼내 놓은 금붙이에 아부하는 뻔뻔함으로 보였다.

모처럼  술을 거른 남편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으며

푸성귀를 무치는 안성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길로 명숙을 데리고 나가 제법 값이 나가는 운동화를 사 주었으나 명숙은 수정처럼 맑은 눈물만 뚝 뚝 떨굴 뿐, 선뜻 그것을 신지 못 했다.

내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간절히 담은 채 신발을 가슴에 품고는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명숙네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아이구 이 년의 팔자야..하는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명숙을 와락 끌어안았다.


중학교의  청소부로  취직한 명숙네가 날마다 주워들이는  몽당연필이나 다 닳은 지우개가 세 자매의 기다림이 되어 갈 즈음, 아비의 끝도 없는 주정으로 인한  집안 꼴이 발전은커녕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다.

예전보다  훨씬 더 억척스러워진 명숙네의 입에서는

나오는 족족이 불평불만도 모자라 아예 안성댁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남편을 괄시했다.

금붙이의 효과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모양인지

안성댁의 욕설과 멸시가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기미가 보였다.

코너에 몰린 쥐새끼라도 잡을 듯이 남편을 향해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집을 나선 명숙네가 다시 불려온 것은 아침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학교 갈 시간인데도 일어나지 않는 정숙을 흔들어 깨우던 명숙의 낯빛이 허옇게 변하며 정말 죽었나 봐...

하는가 싶더니 빨랑 가 엄마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턱 까지 숨이 차는 걸 참으며  물어물어 찾은 명숙네는

변소 청소를 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정숙언니가  죽었대. 빨랑 가자

이번엔 정말 죽었나 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죽을

고비를 넘긴 정숙은 늘 힘 없이 깔딱거리는

여린 촛불 같았다.

머리에 뒤집어쓴 수건을 벗을 새도 없이 명숙네가 허겁지겁 달려 왔을 때, 깔딱깔딱 간신히 숨을 내 쉬는

정숙의 옆에서 명숙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꽃꽂이 돌아 앉은 안성댁은 그깟 기집년

하나쯤  죽어야 무슨 대수냐는 냉랭한 표정으로 정숙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숙의 얼굴을 향해 입 안의 물을 내뿜던 명숙네가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 얻어다 먹이자 그제서야 머얼건 안개꽃이 흐드러지듯 배시시 눈을 떴다.

커다랗고 맑은 눈이 스르륵  떠질 때의 그 모습은

반짝이는  아침 햇살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독사과를 먹은 백설공주가 왕자님의 키스에 눈을 반짝 뜨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고비를 넘겨서인지 털썩 주저앉은 명숙네가 그때서야 안성댁의 괘씸한 소행이 생각 난  것 처럼 쏘아보는 눈에 독기가 서려있었다.

한 입에 잡아먹고도 남을 만큼 살벌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

소나무에서 떨어진 이후로 간이 정말 콩알만해 졌다는 정숙은 조그만 일에도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정숙을 보던 사내 아이들은 기절했을 때  문둥이가 간을 빼먹어 거품쟁이가 되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을 퍼뜨렸다.

둥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일이 찾아내어 한번만 더 그런 소리 했다가는 죽을 줄 알라는 공갈협박을 하는

것 또한 누가 시키지도 않은 ,한 때 경숙의  막중한

 임무였다. 문둥이가  왜 문둥이인지도 모르면서

아이들과 떼 지어 다니며 문둥이를 쫒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누더기 차림에 산발한 머리의 꽃을 보며

거지 중에 상 거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 니네 이렇게 하얗고, 이쁜 문둥이 봤어?

간 빼먹는 것도 봤냐구?

주둥이 잘 못 놀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경숙의 기세에

사내아이들의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방학이 되면 명숙이네 자매들은  쫓겨나다시피 외가로

보내지곤 했는데 단칸방의 설움도, 안성댁의 구박도 멀리 할 수 있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안성댁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 들을,  그것도 한 무더기나 줄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입만 벌리면 애비 등골 빼먹는 쓰잘데기 없는 년 들 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참새 떼 처럼 목 쭈~욱 빼고 가엾은 어미의 등골만 빼먹는 셈이었다.

쉴 새 없이 몸을 혹사시키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악착 떠는 명숙네와는 정 반대로 놀며 쉬며 , 취미처럼

다니다  짤리기를 밥 먹듯 하는 자식이 안쓰러워 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가로 가 있는 동안은 딸년들이 잠시나마 구박과 욕설에서 벗어나 맛난 음식을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은 것처럼

친정에 염치가 없었다.

가에는 식모언니가 둘 있었는데 세심하게 신경쓰며 챙겨 주는 맛에 방학이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푸짐한 상에 둘러앉아 하얀 법랑공기의 밥을 욕심 껏 해치우고 나면  외할머니가 저녁 참 으로 빚어주던 수수부꾸미나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던 노지기 아저씨가 마술을 부리듯 둥근 깡통에 넘치도록 만들던 엿은 입안에서 살 살 녹아내렸다.

외갓집의 풍요로운 추억은 아주 오래오래 곰삭은 김장

김치의 그 맛처럼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로 자리하고 있었다.

경숙이 입버릇처럼 말 하던 외갓집 냄새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겨움과 풍요의 느낌이었다.

외손녀들에게 한결같이 인자했던 외할아버지가 깍두기 모양의 캬라멜처럼 생긴 회충약을 구해 먹이기도 했는데  영악한 경숙은 그것을 입에 물고 있다가 몰래 하수구 구멍에 뱉어 버리기 일쑤였다.

사탕도 아닌 것이  끈적거리는 단 맛을 입안으로 흘려 들여보내면 뱃속의 온갖 구렁이들이 앞을 다투어 꿈틀거리며 속을 뒤집어 놓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

섰다.  방학 내내 외가에서 머물다 돌아갈 때 쯤 이면

서양 미인 같은 멋쟁이 외숙모는  일 하는  언니들과 한데 묶어 극장구경을 시켜 주었다.

내용도 모른 채 , 매산 극장에서 보았던 칠보반지라는 영화가 경숙의 생애  첫 번째 다른 세상이었다.

포악한 왕비가 후궁에게 준 칠보반지를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는데 후궁도 울었고 언니들도 훌쩍거렸다.

정숙이 소나무에서 떨어지던 날  안성댁을 향해

마구잡이로 대들며 통곡했던 경숙은 눈물에서 조차 인색하기로 다짐했던지 눈물은 커녕, 빼앗긴 반지가 아까운 욕심에 발을 동동 굴렀다.

시집온 지 다섯 해만에 성능 좋은 펌프가 물을 끌어 올리 듯, 피를 토하던 남편과 사별한 외숙모는 큼직한 생김새 만큼이나 시원스러운 여장부였다.

아들만 둘 이다 보니 계집애들을 유난히  예뻐했는데 경숙에게 빨강색  멜빵 주름치마에다  솜털 같은 레이스가 너풀거리는 블라우스에  생전 처음 보는 흰 스타킹까지 사 입히고는  혼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인물이 살아나느니, 옷이 날개라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경숙은 가장 비싸고 좋은 옷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 저린 행복함을 느꼈다.

놀다  블라우스의  단추가  하나라도 떨어지는 날엔

하루종일 그  단추를 찾느라 눈을 까 뒤집고 다녔다.

후궁에게 빼앗긴 반지가 그 보다 더 귀하고 원통할까 싶은 마음으로 땅바닥을 이 잡듯이 뒤졌다.

끝내 손톱보다 작은 것을 주워 들고 오는 경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숙네는 아주 튼튼하게  단추를 동여맸다. 쉽사리 떨어 나가는  단추 조차에서도

딸아이의 서글픔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야무지게 매듭을 지으며 눈가를 붉혔다.

자신이 해 주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매듭과 함께 꽁꽁 묶였다.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 #1. 호랑이 안성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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