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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Mar 31. 2024

어서 와, 이런 가족은 처음이지?

명숙아비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주정으로 인해 쫓겨

나다 시피 서너 달에 한번 꼴로 이사 한 장위동 스레트 지붕밑에는 7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명숙네 단칸방 바로 옆이 주인집 인 옥주네 방 이었는데 후미진 골목처럼 생긴 부엌을 따라 큰 방과 작은 방이 하나의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그런 곳 이었다. 누군가의 첩실이라는 옥주엄마는 귀티나는 하얀 얼굴에 쌀쌀맞고 도도했으며 외동딸 옥주는 마치 작은 왕국의 공주처럼 지냈다.

짤록한 허리에 벨트가 묶인 주름진 교복의 옥주는

명숙네 자매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스텐 대야의 물을 떠다 받친 후, 양갈래 곱게 땋아

식모 손의 밥상을 거친 옥주는 하얀 얼굴을 맘껏 뽐내며

날아갈 듯이 학교로 향했다.

옥주네 안으로 하나, 둘 모여들면 화투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부리나케 밭 일을 끝낸 명숙네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자리 핵심 멤버가 되었다.

늘 입버릇처럼 손재주가  많아 손으로 빌어 먹고 사느라 요 모냥 요 꼴 이라던 명숙네의 표현대로 손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야무지고 완벽하게 끝을 내는 성미였다.

유복하게 자란 탓인지 살림에 있어서만은  빵점짜리

는데  손재주와는 별개처럼 음식에 관해서도

솜씨나 성의가 없었다.

되는대로 꿀 쩍 꿀 쩍 구렁이 담 넘어 가 듯이  대충 차려내는 밥상에 군침 흘릴 기회조차도 안겨주질 않았다. 많이 배우진 못 했지만 마음껏 좋은 머리 굴리며 손재주 부릴 수 있는 화투판에 명숙네가 빠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비록 놀음판이지만 치사스런 짓은 커녕, 끈기있고 솔직한 명숙네와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주인 눈에 남다르게 보여 서로 속마음도 터 놓을 수 있는 사이로 변했다. 공사장의 막일을 하던 명숙아비는 어둑해질 무렵 , 의례히 끄어억 소리를 앞세워 양철 대문을

발로 차며 들어섰다.

"이런, 우라질..다 어디 간 거야.? 끄윽,  서방이 왔는데

옘병할  집 구석 ,내다지도 않고 화투판에나 빠져있어? 끄윽, 좋다 이거야.요시.  본떼를 보여주지.

명숙아...칵 퉷,  정숙아...딸년들의 이름을 시작으로

주정이 나올라 치면 명숙네는 재빨리 옥주네 골목 길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니 에미 어디로 갔나 이 썅, 우라질..다 죽었어

칵, 퉤퉤...

그때마다 닥치는대로 휘둘러 때려 부수기 시작했고

손에 힘이 다 빠져 주정으로  지쳐 쓰러질때 쯤에야

명숙네가 슬그머니 비닐 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짓으로 명숙을 불러 낸 어미는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며  "에이그 이 한심한 것아, 다음부터는

바보처럼 때리는 대로 맞지 말고 도망 가  숨어 있어.

그럼 지 깟게 별 수 있겠냐,  하는 귀띔을 해 주었다.

밤중에 자빠져들 자지 않고 무슨 쑥떡공론이냐는 안성댁의 고함을 끝으로 포개지듯 끼어 잠든 후 에야 지긋지긋한 하루가 마감되었다.

명숙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교복 사 줄 형편도 못된 탓에 옥주의 교복을 물려 입긴 했으나 그런 것 조차에도

군소리 없이 응 하는 것이 마냥 기특하고 의젓해 보였다.

낡고 작아진 옷 속에 감추어진 명숙의 눈빛은  풀을 먹인 빳빳한  카라만큼이나  총명한 빛을 뿜었다.

돈을 처 발라가며 키운다는 옥주를 제치고 굴러 온 돌이 온갖 상을 독차지하다 보니 걸핏하면 옥주 입에서 치사한 소리가 쏟아져 나와 몰래 눈울 짓게 만들었다.

"교복도 못 사 입어 내 거 얻어 입은 주제에...

니가 나 아니면 중학교 문턱이나 밟아 보겠니?

교만하고 건방진 딸을 타이르는 옥주엄마가 더 무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옥주의 콧대는 찢어진 눈꼬리만큼이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기가 죽어 꼬랑지를 내리고 절절 기는 명숙의 모습이

드세고 귀한 주인 집 딸내미 앞에서만은 구멍가게의 똥개 만큼도 못한 처지였다.


가을 소풍이 있던 날,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정숙으로 인해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소풍도 땡땡이친 채, 행방불명이었던 정숙은 만화가게에 머리를 처 박고 하루를 보냈는데 통금 싸이렌에 맞춰 주인 손에 이끌려 온 정숙을 보며 안성댁이 같잖다는 투로 한마디 했다.

"칠뜨기가 괜히 칠뜨기여, 내 별명하나는 기가 막게 지어 줬지. 나갔으면 그만이지 뭐 하러 다시 기어들어와.

그깢눔의 학교 안 다니면 대순가, 이 김에 때려 치워라

싹수가 보인다...괜히 지 아비 등골 빼먹지 말고

쓸데없는 기집년들.. 등등

하나라도 없어져 주길 바랐는데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한 심술이라도 난 것처럼 고약을 떨었다.

김밥이 아닌 것이 땡땡이 이유였던 정숙은 하루종일

쫄 쫄 굶으며 소풍이라고 몇 푼 찔러 준 것을 만화가게에 몽땅 털어 넣었다.

그 김에 만화가게를 알게 된 경숙이 틈만 나면 뽀로로 달려가 순정만화에 푹 빠지던 시절이었다.

빠른 손 보다 더 빠른 눈으로 슬쩍 집어다 보는 것이

얼마 안 되는 대가를 치른 것보다 더 많이 본다는 사실에 기분이 째지도록 좋았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찬장 맨 위칸의 작은 종지 뚜껑을 열면 명숙네의 피, 땀으로 얼룩진 돈이 모셔져 있었는데 야곰야곰 훔쳐다 만화 보는 일이 경숙을 무아지경에  빠트렸다.

그러다 아이스케키 소리에 뛰어 나가 팥으로 뭉친 그것을 사 먹노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억척스럽고 극성스러운 경숙은 동네의 또래 남자  애들을 모두 제치고 골목대장을 맡기도 했다.

별명이 만두였던 두 살 위의 대장이 영 시덥잖던 차에

궁안산으로 끌고 가 대결에 이긴 사람이 대장이 되기로 으름장을 놓으며 나뭇가지를 던져주었다.

지레 겁에 질린 선임이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것 으로

경숙의 승리가 되었으나 막상 속으로는 이 아이가 정말 목검을 휘두르며 덤벼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이판사판이라고 상대에게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날 이후, 만두는 경숙의 충실한 심복이 되었다 .

머리핀이나 옷핀을 싹쓸이해서 왕 옷핀에 줄줄이 매달고 다녔으며 언니들의 교과서를 몰래 찢어 만든 크고 작은 딱지들은 치는 족 족 다 뒤집혀 찬장 서랍에 수북이 쌓였다.

그것을 보던 명숙네가 우스개 소리를 했으나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찌든 삶에 서린 한 이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돈이라고 씨알꼽쟁이도 안 되는 거 죄다

훔쳐가 만화가게에 털어 넣더니 대신 딱지로 채워 넣냐..

에이그, 저게 딱지가 아니고 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내 날마다 업고 다닐 텐데...

그 소리를  듣던 경숙은 빈말일지언정 이 담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짐을 했다.

골목대장에 딱지왕은 물론, 저만치 돌멩이를 세워 놓고

던져서 쓰러뜨리는 비석 치기나 땅따먹기도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공기놀이를 할 때면  손바닥을 뒤집는 족족 손등으로 공깃돌이 얌전히 올라 앉았다.

경숙에게 걸려들면 땅이든 옷핀이든 딱지든, 그날은

임자 제대로 만나는  운수 나쁜 날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동네어귀에  얕은 구덩이를 파놓고 그 위를 짚으로 살짝 덮은 음 , 누가  빠지는지를 숨어서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윗동네의 부잣집들을 한 바퀴 돌며  초인종누르고  도망가기도 앞장 섰고, 겨울이면  남의 김장독을 몰래 열어 흰 눈에 뻐얼건 김치국물 뚝 뚝 흘려가며 훔쳐먹던 김치맛도 잊을 수 없는 꿀맛이었다.

남의 집 앞에 연탄 재 잔뜩 쌓아 놓고 도망가기,

금강산 찾아 가자 일만이천봉...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외치며 안성댁의 표현대로 가랭이 일그적거리던 고무줄 놀이 등, 경숙에게 있어 놀이란 놀이는

 거칠게 없었다.

동네어귀의  설탕 뽑기 총각이 침 발라 가며 뽑은 모양을 바꿔주지 않자 화가 난 경숙이 난동을 부리며  그 비싼 설탕 깡통을 엎어버렸는데  너 같은 년  처 봤자 개 값 물어 줄 일 있느냐며 악담을 끝으로 천막을 거두었다.

쪼그만 년이 개지랄도 떤다는 말 끝에 저런 악바리 살다

살다  첨 보다는 소리를 했는데 뽑기를 너무 잘 해 첨 본다는 건지, 어린 것의 지랄 맞은 성격에 질려 버린 것인지 어쨌든 뽑기 총각은 그렇게 그 동네를 떠났다.

하지만 국자에 설탕을 녹여 찍어내던 여러 가지 모양 들이나 하얀 돌덩이처럼 생긴 달고나는 잊을 수 없는

옛 시절의 멋과 맛이 담긴 추억이 되었다.


닥지닥지 붙은 장위동 판자촌 동네에 어올리지 않는 이층 양옥집이 있었는데 이름 또한 생소한 구슬이는 아버지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치사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돈 몇 푼 받는 재미로 표준전과를 빌려주는가  하면 온갖 감언이설로 전도를 하고는  한 주일이 시작될 때쯤

이면  또 싸움을 걸었다.

돈이 없는 경숙은 표준전과를 빌리는 대가로  숙제를

도맡았고 그 애는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던지 얄밉게

쪽쪽거리며 빨아먹던 눈깔사탕을 모기 오줌만큼 깨물어 나눠주었다.

 사나흘이 지나면 다시 또 혼자만 가지고 있는 전과를 미끼로 살 살 꼬드기며 전도를 반복했다.

그 애의 아버지는 딸의 고약한 소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도상혼자 독차지했다.

부당하게  상을 가져가는 것을 못마땅 해 하던 경숙은

전과의 중간중간을  감쪽같이 찢어내기도 하고

교회귀퉁이에 불려 나가 장난으로 한 주일을 마감했다.

교회 나가는 조건으로 받는 눈깔사탕에 눈이 멀어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가긴 했으나 잿밥에만 욕심부리던 나머지 '모두 기도합시다' 라는 목사님의 경건한 주문에도 불구하고 눈깔사탕 보다 더 큰 눈을 떼떼굴 굴리며 장난을 일삼았다.

그 순간을 틈 타 키득거리며 신발 감추기 놀이도 했고

누가 기도시간에 두 눈 번쩍 뜨고 허튼 짓 하는지의 감시를  두 눈 번쩍 뜨고  자처했다.

신성한 교회에 앉아 장난만 치다가는 이 담에 죽어서 불구덩이로 떨어질 거라는 순진한 친구의 말을 들으며

경숙은 세상 다 산 것만 같은 어른 말투 말했다.

"누가 그러더라, 천당 가 봤자 심심해서 못 산대.

지옥으로 가야 다 만나고 얼마나 좋겠니,

너나 열심히 기도해서  천당가라,

나중에 혼자 외롭다고 엉 엉 울지 말고...

말 같지도 않은 허풍에  그 애는 귀가 솔깃했는지 그게 정말이냐며 경숙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녁 해가 꼬리를  감출 무렵, 동네어귀에 나타난 명숙

아비의 옆에는 순경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다방구 놀이를 하던 경숙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부리나케  엄마를 찾아 아버지랑 순겅이 같이 온다는

말에 옥주네 화투 멤버들은 재빨리 판을 엎은 후 다락으로 숨어들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신고한 사람처럼 멀쩡한 정신에

흠,  흠...헛기침을 하며. 이 방입니다.  

점잖을 떨던 명숙아비는 오로지 현장을 잡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예의도 묵살하고는 남의 안방 문을 확

열어제꼈다.

발톱에 메니큐어를 칠하던 옥주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바쁜 사람 헛걸음하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신고하라는 순경의 핀잔이 들렸다.

머쓱해진 명숙아비는  우라질,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냐...며 비닐 문을 발로 냅다 걷어 찼다.

사람 좋은 탓 인지, 정해진 화투 멤버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번번이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옥주네는 방 빼 라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월사금을 못 내는 경숙이 수차례 집에 돌려 보내졌어도

명숙네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화투짝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기였다.

시간을 때우느라 장위시장을  두어 바퀴  돌면서 군침을

삼키던 경숙은 시장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큰 결심을

한 것처럼 건어물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땅콩이 눈앞에 어른 거려 슬쩍

한 알을 집어 들었으나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도둑년 소리만  들으며 혼찌검을 당했다.

손바닥에 꼭 쥐고 있던  땅콩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땅콩 주인인 땅딸이 아저씨는 엄마를 데려 오라는 둥,

순경한테 가서 혼나야  못된 짓을 안 하겠느냐며

맘 놓고 협박을 했다.

그 시간에 시장바닥을 돌며  땅콩이나  훔쳐 먹는 계집아이가  당연히 학교는  다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지 학교소리를 꺼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정작 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추접스러운 꼴만 다한 경숙은 선생님 앞에 가서야

엄마가 집에 없더라는 천연덕스러운 거칫 말을

늘어놓았다.

별명이 흰 염소인  늙은 여선생은 들은 채도 안 하며

경숙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월사금도 못 내고 미운털 박힌 경숙을  들 들 볶는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던  흰 염소는  엄마를 데려 오던가, 아니면 학교에 오지 말라는 명령을 하며

말조차도 아까웠는지 눈짓으로 다시 돌려 보냈다.

시장 끝의  득실거리게 넘쳐 나던 고아원 아이들과 똑같은 차별을 당하다 보니 차라리 고아원 소속이라면

월사금 따위로 되돌려 보내지는 멸시나 수치스러움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아  어찌 보면 경숙의  처지가 가장 밑바닥처럼 느껴졌다.  흰 염소의 협박처럼 그 좋아하는 학교를  정말 못 다니게 되면 어쩌나 , 하는 순진한 마음에  허겁지겁 먼 길을 다시 달려 온 경숙은 숨이 턱 까지  차 올라 헉헉대기  시작했다.

옥주네 방문 앞에 되는 대로 벗어 던져진 신발을 나란히 으며 엄마... 부르려다 그냥 돌아서는 눈에  이슬이 맺혔다.  또 화투판을 벌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 외 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은 채

월사금이 밀려서 왔노라는 말 한마디 없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누가 기다리며 반겨 주는 것도 아니건만 헐레벌떡 시장

중간까지 땅콩 주인을 피해  뛰다 보면 어린 나이에도 신세한탄에 이어 끝없는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이 담에 어떤 어른이 될 런지 두고 보자, 하는

혼자만의 앙심을 품으며  뛰는 가슴은 그 앙심보다도 더 큰 소리로 쿵닥쿵닥 방망이질 쳤다.

몸도, 마음도 서릿발에 눌린 것처럼 지친 날에는  꿈

속에서 찔끔찔끔 오줌을 싸곤 했는데 잠결에 느껴지는

아랫도리의  축축함에  깨는 순간부터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럴 때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깔고 앉아 그 자국을 말리느라 홀딱 밤을 새우다가

다음 날  흔적을  들킬세라 버거운 이불을 개기도 했다.

오밤중에 자빠져 자지 않고 두억시니처럼 웅크리고

앉아  청승을 떨더라는 안성댁의 욕설이 두꺼운

이불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추운 겨울날에도 안성댁은 손바닥만 한 방을 쓸고 닦느라 영식을 제외한 네 자매를 밖으로 내몰았는데

기집년들 똥가루 떨어진다는 명분으로 한참이 지나도

불러 들일 생각을 안 했다.

군데군데 기운 자국에 무릎이며 엉덩이가 툭툭 불거져

나온 빨강 엑슬란 내복은 다  닳아빠져  번들거렸고

낡은 고무신 위로 삐쭉 고개 내밀던 발등은 땟 자국에

은  얼룩무늬였다.

오들거리며 입가에  두 손을 모은 채 호~ 불다가도

마 끝에 늘어져 있는 수정고드름에 위안을 삼았다.

이제나  저제나 그놈의 방이 다 치워져 불러 들이기  만을 학수고대했으나  안성댁의 고약은 늘 반나절을 넘기기 일쑤였다.

먼지와 함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년 들을 훌 훌 털어

내 버리고 싶은 무언의 앙갚음이었을까.

없는 형편에 지지리 재수까  없는 탓 인지 경숙은

늘 차별이 심하고  까탈스러운 여선생만 걸리는 학교생활에 점 점 회의를 느꼈다.

신체검사를 하던 날, 목간이라고 해 봐야 연중행사에 불과했던 터라  까마귀가 아이구 형님...하며 모실 만큼 의  땟국물 투성이었던  경숙은 교실의 구경거리였다.

낡은 러닝바람의 양 팔이며 목 언저리가 총 천연색 으로 번들거렸다.

반질반질한 넓은 이마에 파리가 미끄러질 것 같은

선생은  회초리로 경숙의 어깨를 툭툭 치는 동시에 얄팍한 입술로 망신살 뻗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 얘 얘, 이게 뭐니  도대체..까마귀 사촌도 아니고

좀 씻고 다녀라, 아이구 드러워서 원, 느이 엄마는

이런 꼴로 애 학교를 보내고 싶다니,

신체검사 날이라고 누누이 말 했건만..

경숙은 있는 대로 자존심이 상해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더 창피했던 건 남자 아이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었다.

"얼레 꼴레리 누구누구는 때 박사래요, 얼레꼴레리..

그날부터 아이들은 경숙을 때박사라고 놀려 댔다.

정숙에게 문둥이라고 놀리던 사내놈들 쯤 이야

눈 부라리는 거 한방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부인 할수 없는 현실의 때 자국 앞에서는 그련 것도 통하지 않았다. 깍쟁이에다 사납기까지 한 여시선생은

어느 날  성적순으로 분단을 나눈다며 점수를 공개했다.

비록 전과를 빌려  쓰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시험 쯤 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었던 터라

잔뜩 기대를 했다.

총 다섯 과목에 사회  문제 하나를 아리송했던  것으로

뻔한 점수를 알고 있었는데 수 분단에 앉을 첫 번째

타자로 이름을  호명하던 선생은 아니, 아니야,

잘못  불렀어.. 제 풀에 화들짝 놀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더니 집안 좋고 공부는 지지리도 못 하는 치과 집 딸을 그 자리에 앉혔다.

어느 세월 엔간 불러주겠지, 목 빼고 기다리던 경숙은

가분단 맨 마지막에야 호명되었다.

더 웃기는 일은 쉬는 시간마다 모자라는 공부 가르친다 는  명분하에 수분단 아이들이 우루루 떼거지로

 가 분단에 몰려들어 변소 가는 시간마저 빼앗았다.

눈이 찍 올라간 값을 하느라 학예회 때 콩쥐 팥쥐의 못된 팥쥐역을 했던 돌대가리 치과 집 딸은  치과의사인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채,  철사로 고정한  이빨을 쑥 내 보이며 상냥한  척, 엉터리 설명을 하느라

버벅거렸다.

알아도 모른 척, 고개까지 끄덕여주며  어떤 때는 묻기까지 하면서,  또 어떤 때는  팥쥐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 거꾸로 설명을 해 주는 선심까지 쓰며

 비위를 맞춰주었다.

돈이 없으니 속알머리도 빼 던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우리 반 최고 실세인 그 애의 고정한 이빨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이빨에 꽉 쪼여지도록 부착된 철사꾸러미가 마치

돈으로 보이는 치졸함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갓 결혼한 신혼의 불여시 선생은 꼭 둘째 시간이  끝날 때 쯤  고아원아이를 자기 집으로 심부름 보냈다.

아궁이의 연탄불을 갈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그

애는 끝마치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폐병 환자 같은

누렇게 뜬 얼굴로 켁 거리며 들어섰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던 경숙은

그나마 고아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졌다.

부모가 버젓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찌그러진 환경에 짓눌리며 신히 국민학교를 나온 경숙은  중학교에 진학 할 꿈도 못 꾸었다.

남 들 다 가는 곳에 보내지  않으니 당연히  그냥 못 가나 보나,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우런 이유도 내세우지 않았다. 국민학교와는 달리 보내주면 가고, 안보내니 못 가는 것 인 줄 로만 알았다.

정작 본인은  아무 말 안하는데  명숙네가 절절 매며

한 해만 지나면 꼭 보내준다는 말을 했으나 그 말 뜻이 뭔지도 몰라 반응이 없자  에이그, 헛 똑똑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보잘것 없는  살림은  점점 더 궁색해져 궁안산 자락의 구석진 곳으로  이사를 하는데  명숙아비가 끄는 리어커의  남루안 보따리들이 그것을 증명하듯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 세월의 화투멤버인 옥주엄마는  명숙네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옹색한 셋방살이를 할 망정 진실하고 성실한 명숙네를

남다르게 생각했던 터라 서운한 감정이 훨씬 컸다.


좁은 골목 끝의 ㄷ자 형 집에는 모두 여섯가구가 살았는데 생선장사 박씨아줌마 모녀와  홀아비 지씨 아저씨, 그리고 가운데 방에는 윤아 할머니의 신당이 차려져 있었다. 그 옆 방이 미혼모  윤아 엄마와

인형처럽 예쁜 윤아의  부엌 겸 소꼽같은 살림방 이었다. 주인인 정란이네가 큰 방을 쓰면서 다락방에는

중학생인 정식이의 비밀스런 아지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 밑으로  채 몇 걸음도 안되는  부엌을 사이에 두고 그나마 큰방이 안성댁과 영식의 거처였고,작은 방이 나머지 여섯 식구의  들들 볶는 후라이팬 같은 공간이었다.

지지고 볶고 그야말로 하루도 조용 할 날이 없이  마당

한 가운데서  들리는 안성댁의 큰 기침과 욕설로 명숙네 아침이 시작되었다.

"야. 이 우라질년들,  여태 자빠져 자고 뭐 하는  짓 들이여.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속에 자빠져들 있으면

어디 밥 처  먹고 살겠다 쯧쯧찃...

기집년이 소학교만 나와도 감지덕지지, 중학교가 모 말라 비틀어진거 냐며 진학을 결사 반대하면서 그 덕에  단칸방을 면해서인지 안성댁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사바사바 하는 소리와  함께 끝도 없이 쓸고 닦았다.

걸레질이라도 할 때면 그놈의 똥가루 떨어진다는 노랫소리가 여지없이 네 자매를 밖으로 내 모는 통에

순한 정숙이 불만을 다 토해 낼 정도였다.

"할머닌 맨날 우리만 내쫒더라,  추워 죽겠는데 할머니

방이나 치우지 뭐 하러 여기까지 쓸고 닦느라 내쫒구 난리냐구...영식인 얼어 죽을까 봐 이불속에 꽁꽁

묻어두면서..."

모처럼 쫑알거리는 정숙을 부추기듯 명숙이 슬그머니 지들만의 암호를 보냈다.

"니비가바 차바머버,귀비시빈 가바트븐 하발머버니비

**니가 참어, 귀신같은 할머니**

말 끝에 ㅂ자를 섞어 알 수 없는 소리로 깨득거리면

안성댁은 육시랄년들비싼밥 처먹고 할 짓들이 없으니

가리소리를 다 한다며 눈을 흘겼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그저 욕으로 터트렸다.

어린 시절, 빨간 엑슬란 내복차림에  햇빛 드는 처마 밑을 찾아 병든 닭 모냥 웅크리고 있다 보면 아비에게 쫓기다 숨었던 기억들까지 머리를 들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영광의 상처로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초라한 추억이었다.

손바닥만한 방을 몇 시간에 걸쳐  청소를 끝낸 안성댁은

사바사바 소리와 함께 네 자매를 다시 들들 볶았다.

보다 못한 명숙네가 아따따, 그놈의 방 이나 치울 일 이지 누가 여기까지 들쑤시랬느냐며 삼팔선을 그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럴 때마다 " 하발머버니비 주부거버쓰브며번 조보케베써버..

**할머니 죽었으면 좋겠어**  라며 혼자 앙탈을 부렸다.

대갓집 마나님 같은 거만스러운 태도로 좁은 공간을 휘젓는 모습에 저절로 눈이 흘겨졌다.


시장에서 생선 자판을 하는 박 씨 아줌마네는  노처녀 딸이 하나 있었고 , 또 커다란 텔레비젼이 있었다.

저녁이면 생선 비린내 폴폴 풍기며 들어오는 아줌마의 뒤를  이어 온 집안의 식구들이 그 방으로 몰려들었다.

누가 정해 놓은 일도 아니면서 어느 날 부터인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습관임에도 박 씨 아줌마 모녀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틈에 끼어 앉아 어깨너머로 보았던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열네 살 경숙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니, 무작정 훔쳐내고 싶은 커다란 꿈이었다.

그런 날은 으례히 얼굴만 겨우 비춰주는 안성댁의 색경을 몰래 집어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 많은 꿈을 꾸었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보다 더 활짝도 웃어 보고, 할미꽃보다 더 애절하고 가련한 표정도 만들며

그야말로 여우토깽이 같은 도섭을 했다.

그런 경숙을  노처녀 선이는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남 들 다 가는 학교도 못 간 채, 우물가에  쭈구리고 앉아

고된 일 이나 하는 경숙이 안됐던지  살짝 불러들여

손바닥만한 김에 하얀 쌀밥을  듬뿍 싸서 주었고,

전 날 팔다 남았을 고등어며 꽁치를 들려보냈다.

그럴 때면  찰싹 맞을 정도로 비린 것을 좋아하던 안성댁이  쓸모없는 기집년도 지 밥벌이는 한다며

 입이 찢어졌다.

어디서 난 것인지 뻔한 사실을 외면한 채, 너무도 떳떳하게 뼈를 바르는 모습은 추접스럽기까지 했다.

아무 하는 일도 없는 선이가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껌 짝짝 씹으며 저녁 외출을 할 때면 그 모습마저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기집년이 손바닥만 한 걸레쪼가리 걸치고 엉덩이

뒤 흔들며 사내놈이나 후리러 나간다는 안성댁의

고약한 소리에 박 씨 아줌마가 퍼 올리던 두레박 물을

내동댕이 치며 거품을 물었다.

"어떠니 저떠니 해도 내 집 귀한 새끼니 허튼 소리 한 번만 더 했다가는 누구든 칼부림 나는 줄 알어"

차마 대 놓고는 못 하겠던지 다 싸잡아서 엄포를 놓는 박 씨 아줌마의 칼부림 대상이 안성댁이라는 것은 뒷집

누렁이도 알 만한 일 이건만 정작 험한 입 놀리던 안성댁만은 곧 죽어도 깨갱이라고 목에 핏대 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아..말 이야 바른 말 이지, 다 저녁에 떡칠하고 나가

할 짓이 뻔할 뻔 자 아닌감. 그렇게 역성 들여 키워 봤자

자식 망치는 줄도 모르고.  에잉 한심한 것들..

니 집 내 집 할 거 없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박 씨 아줌마를 달래며 고약스러운 시에미를 대신해 명숙네가 사정했기 망정이지 무슨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 판국이었다.

저녁나절의 가끔씩 하는 외출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박씨 아줌마는 꼬질꼬질 뗏자국이 반들거리는 고쟁이에서 비린내에 쩔은 돈을 뭉터기로

꺼내주었다.

하루종일 먹고 뒹굴며 재방송만 틀어대는 선이의 손은 비단결보다 더 곱고 예뻤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경숙아...노올자, 하며 우물 건너편을  향해 상냥하게 불렀다.

멍 하니 앉아 담벼락에 기어오르는 벌레의 수 나 세고 있던 경숙은  총알보다도 더 빠르게 선이에게로 달려 갔다. 미제 비스켓이나 초코렛 따위를 한 주먹 건네 주며 고운 얼굴로 반겨 주는 선이가 경숙에게는 가장 부러운 존재였다.

집 떠나면 다른  좋은 세상이 기다려 주기라도 하는 것 처럼  지 멋대로 중학교도 포기 한  채 가출을 일삼던 불량소녀 였을 망정, 곱디 고운 손도 부러웠고

색다른 먹을거리에 더 목이 미어졌다.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의 딸 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선이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처녀였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서인지 유난히 경숙을  챙겨 주던

그 따뜻한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 후에야 알게 된 일 이지만. 선이가 노랑머리의

코쟁이와 여인숙을 들락거리더라는 소문에 안성댁은 코웃음을 치며 또 고약을 떨었다.

" 내가  뭐라디, 귀신을 속이지 날 속여?하구 다니는 짓꺼리가 영 심상치 않더라니. 지깢년이 때 빼고 광

 내 봤자 양갈보지 뭐여. 육시랄.

박 씨 아줌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안성댁의 험한 욕설에 정말 칼부림 날 일이라며 모두 쉬쉬 거렸으나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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