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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K Aug 06. 2019

술이 가장 달달한 순간, 36.5도

수능 백일주라니,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 담긴 주사를 후루룩 훑어보고 있자면 잊고 있던 달큰하면서고 부끄럽기도 한 기억들이 피어오른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학생회장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공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목표를 특히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1회 졸업생이면서 초대 학생회장이라는 묘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야자시간까지 나를 앉아있게 했다.

겉으로는 공부하는 척하고 있었으나 나의 관심사는 늘 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들을 학교 주차장으로 불러내 학교 근처에서 놀다 돌아오거나, 공부하기 싫은 친구와 함께 자정이 넘은 시각 호그와트를 돌아다니는 해리포터처럼 몰래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수능 백일이 다가왔다. 후배들도 응원해주고 다른 학교들을 보니 수능 백일이라고 무슨 응원제 같은 것도 한다. 촌스럽게시리.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날이 술 마시기 가장 좋은 날임을.

늘 공부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 날이 정확하게 수능 백일 전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많이 마셔서 그런가. 우리 집으로 모였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그리고 나는 우리 집에 좋은 술들이 어디 찡박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로얄 살루트처럼 외관에서부터 우리를 압도하는 술이 있는가 하면 알아볼 수도 없는 휘갈겨진 한자로 쓰인 술까지 없는 게 없었다. 표면이 우둘투둘한 크리스탈 잔부터 깔끔하고 심플한 샷잔까지,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술을 들고 테이블을 잡았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분명 대학 이야기를 하다 쓰레기 같은 선생들을 안주로 씹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꼰대는(선생이라는 칭호도 아까우니) 자기 감정을 주체 못 해 애들 허벅지를 피멍으로 만들어 놓더니 꽤나 잘 사는 친구 집에 찾아가 불법 과외를 했던 사람이다. 물론 그 사람이 담당하던 과목에서 그 찬구의 내신은 만점이 나왔고.

이래저래 쌓인 분통과 답답함은 술잔을 따라 조금씩 비워져 갔다. 수능 백일에 말이다. 비움이 있어야 다시 채우는 법이 있다 했던가, 우리 집 변기는 술도 못 마시는 친구의 속으로 채워지고, 비워진 속은 다시 이름을 알 수 없는 술로 채워졌다.

우리는 술을 길들이지는 법은 몰랐지만, 술은 늘 그랬듯 우리 모두를 길들였다. 그렇게 테이블로 가져오던 술은 차츰 잦아들고, 우리 몸도 점점 풀려갔다. 그렇게 우리의 수능 백일은 부지불식간에 저물갔다.

우리는 수능을 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민증을 뒷주머니에 넣고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 마냥 술을 알아가고 길들여가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술의 당도, 질감, 여운을 느끼면서 술을 마시게 됐다. 아무튼 그렇게 됐다.

그런데, 술을 먹었긴 한데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마셨던 수능 백일 때는 왜 그렇게 행복했던 것일까.

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알아가면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가장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가장 마시고 싶은 사람과 마시는 것이라는 걸.





아무튼, 사람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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