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의 첫 연이다. 이 시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항상 아름다운 뒷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운전을 시작하면서 이 시를 이렇게 바꾸고 싶어졌다.
멈춰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멈추는 이의/ 발걸음은 얼마나 고귀한가.
내가 운전하지 않을 때는 몰랐다. 무단횡단자가 이렇게 많은지를…. 요즘에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도시의 고라니라고 불리는 전동 킥보드까지 서슴없이 무단횡단을 한다. 운전자에게 제일 무서운 존재는 멈추지 않는 자들이다. 무단횡단자도 그렇고, 빨강 불에 멈추지 않은 신호위반 차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예측 불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편도 8차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거북보다 더 느리게 걸어오는 노부부를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적색 신호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진격의 코뿔소처럼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할머니는 다리까지 불편해 보였다. 순간 그들을 붙잡았다. 차가 없는 한적한 오후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할머니 팔에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착 끼었다.
“할머니 지금 건너면 안 돼요. 좀 기다리세요”
“아이고 뭔 상관이여…. 그냥 가도 돼”
“할아버지 안 돼요. 할머니 모시고 조금 기다리세요”
“괜찬혀”
두 노부부와 가도 된다, 안된다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창피한 건 둘째 문제였다
“아휴 조금만 기다리시면 초록 신호 들어와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러다 사고 나면 할머니 도 할머니이지만 운전자는 무슨 죄예요?”
드디어 초록 신호가 들어왔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구시렁거리는 두 노인의 시선을 뒤로하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길을 건넜다. 사람들은 왜 무단횡단을 하는 걸까? 물론 급한 일이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습관일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에서도 잠시 멈춤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무조건 앞만 보고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고 긴 인생길, 잠시 멈춤이 있다고 해서 어떻게 되진 않는다. 어느 40대 직장인이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밤새워 일하다 과로사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모델이나 배우들이 다이어트를 지나치게 해서 거식증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도 종종 보았다. 분명 몸에 이상 징후가 있었을 텐데, 제발 멈추라고 빨강 신호등이 들어왔을 텐데 멈추지 않는 결과가 죽음이라니….
그러는 나는 과연 삶에서 멈춤을 잘했을까? 아이를 훈육할 때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으면 그만해야 하는데 잘못을 뿌리 뽑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혼을 낼 때가 있었다. 아이가 잡초도 아니고 뭘 뿌리 뽑겠다고 아이를 공포로 몰아붙였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다툴 때도 어느 정도 했으면 멈춰야 하는데, 결국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몰아붙일 때도 있었다. 나는 왜 적당한 때에 멈추지 못했을까? 브레이크 망가진 자동차처럼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나를 돌아보니 입맛이 쓰다.
미국의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와 다이안 레인이 나오는 ‘언페이스풀’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들은 두 자녀와 안정된 삶을 사는 중산층 부부이다.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 여자는 쇼핑백의 물건을 떨어뜨리고 넘어져서 무릎도 까지는 등 난처한 상황을 겪는다. 때마침 젊고 멋진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도와준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자기 집에서 상처도 치료하고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가라고 제안한다. 젊고 멋진 남자가 말이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를 따라 들어간다. 다음은 뻔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해 불륜으로 이어지고 남편이 알게 되어 결국 남편이 그를 죽이는 결말이었다. 자수를 결심하는 남편과 눈물의 포옹을 하며 그녀는 회상한다. 그가 다가온다. 물건을 주워주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괜찮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그녀는 멈출 수 있었다. 아니 그때 멈췄어야 했다. 수많은 멈춤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빨간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멈춰야 할 순간이다. 무시하면 안 된다.
이번 여름휴가는 큰 애가 고3 수험생이라 안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남편과 막내가 여름휴가 어디 갈지 물었다.
“여보 무슨 말이야 큰 애 고3인 거 잊었어. 무슨 여름휴가야. 막내도 언니를 위해서 이번에는 가지 말자. 수능이나 끝나고 어디라도 다녀오자”
남편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고 둘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옆에 있는 큰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왜 안 가? 뭐, 고3은 하루도 못 쉬고 계속 공부만 해야 해. 난 가고 싶어”
고3 수험생을 위해 이번 여름휴가를 멈춤 하려는 내 계획은 어긋났다. 대신 고3 수험생의 잠시 멈춤을 위해 우리는 휴가를 떠났다. 부랴부랴 예약하느라 비싼 대가를 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