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상권은 왜 회사가 되어야 하는가?

지속 가능한 지역 운영을 위한 일본의 30년 사투와 구조적 통찰

by 김영기

한국의 지역 상권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 정부 지원금이 투입될 때만 반짝 활성화되었다가, 지원이 끊기면 다시 공동화되는 보조금의 저주다. 일본 역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30년 넘는 시간 동안 처절한 실험을 반복해 왔다. 일본의 상권 조직이 관(官) 주도에서 민간 회사로 진화해 온 과정은 단순히 행정적 변화가 아니라, 지역을 하나의 '경영 단위'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식의 대전환 과정이다.


1. 1세대 TMO(1998~) : 도시 진단이라는 씨앗, 그러나 행정의 벽

일본의 중심시가지 활성화가 본격화된 것은 1998년 TMO(Town Management Organization) 제도의 도입부터다.

배경 : 대형 쇼핑몰의 외곽 이전과 인구 감소로 도심 상권이 붕괴하자, 개별 점포 지원을 넘어 도시 전체의 경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구조 : 경제산업성 주도로 지자체나 상공회의소가 운영 주체가 되어 상권 활성화를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실패의 교훈 : TMO는 철저히 행정 중심이었다. 계획은 훌륭했지만, 현장의 역동성이 없었다. 공무원들의 순환보직은 사업의 연속성을 끊었고, 민간 상인들은 자신들이 주체가 아닌 수혜자로만 머물렀다. 결국 계획만 있고 실행은 없는 행정 절차의 늪에 빠졌다.


2. 2세대 협의회(2000년대 초반) : 거버넌스의 확장, 그러나 흩어진 책임

TMO의 경직성을 깨기 위해 등장한 것이 상점가, 주민, 민간 기업이 참여하는 '협의회' 모델이다.

진화 포인트 : 누가 주도하느냐보다 누가 참여하느냐에 집중했다. 지역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모여 머리를 맞대는 거버넌스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조적 한계 : 협의회는 훌륭한 말하기 플랫폼이었지만, 책임지는 주체는 아니었다. 법적 권한이 모호했고, 독자적인 재원이 없었다. 회의는 잦았으나 결론을 내리고 예산을 집행할 힘이 부족했다. 결국 실질적인 관리보다는 친목이나 단순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3. 3세대 마치즈쿠리 회사(현재) : 수익성과 공공성의 결합

두 차례의 큰 실패 이후, 일본은 혁신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지역을 운영하는 주체 자체를 영리 법인(회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치즈쿠리 회사다.


왜 하필 회사인가? (핵심 차별화 포인트)

자본 기반의 책임 경영 : 주민과 기업이 직접 돈(출자금)을 내고 주주가 된다. 이는 "내 돈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력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재원의 자립 :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천수답 경영을 끝냈다. 주차장 운영, 공간 임대, 지역 브랜딩 사업 등을 통해 스스로 수익을 창출한다. 이 수익은 다시 지역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를 가진다.

임대인(건물주)의 참여 : 가장 결정적인 변화다. 건물 소유주를 경영의 핵심 주체로 끌어들였다. 상권이 살아나면 건물 가치가 올라가는 임대인들에게 지역 관리의 책임을 부여하여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예방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게 했다.

전문가 상주 시스템 : 행정 서류를 만드는 직원이 아니라, 지역을 마케팅하고 부동산을 기획하는 전문 인력을 '정규직'으로 채용하여 10년 이상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일본의 진화가 한국 상권에 던지는 3가지 질문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한국 상권 정책의 방향성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상인을 돕고 있는가, 상권을 경영하고 있는가? : 개별 상인에 대한 직접 지원은 한계가 명확하다. 이제는 상권이라는 플랫폼 자체를 경영하는 조직에 집중해야 한다.

누가 주머니를 열 것인가? : 세금으로만 운영되는 상권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역 자산가와 임대인이 투자하고 수익을 나누는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하다.

공공은 주도하고 있는가, 지원하고 있는가? : 지자체는 직접 운영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민간이 뛰어놀 수 있는 제도의 운동장을 만드는 역할로 물러나야 한다.


<일본 지역 운영 조직의 진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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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상권 활성화가 사업이 아니라 운영이자 경영임을 가르쳐 준다. 조직의 이름이 무엇이든, 스스로 수익을 내고 책임지는 구조가 없다면 그것은 모래성과 같다.




조직의 뼈대를 갖추었다면, 이제 그 속에 흐를 철학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다음 글에서는 마치즈쿠리 회사가 단순히 돈을 버는 회사를 넘어, 어떻게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며 수익을 창출하는지 마치즈쿠리 회사의 형성과 운영 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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