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상권을 경영체계로 바꾸는 SLMO 설계 전략
일본의 지역경영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한다.
이 모델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어떻게 변환하면 한국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가?”
일본의 마루노우치, 미나토미라이, 센바, 텐진·하카타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민간 주체 중심의 운영, 자립형 재원, 상시 운영조직. 문제는 이 구조를 한국의 현실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이다.
한국 상권정책의 가장 큰 한계는 출발점에 있다.
지금까지 상권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고, 지원해야 할 영역이었다. 그래서 정책도 자연스럽게 보조금, 시설 개선, 이벤트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다.
하지만 일본 사례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보여준다.
상권은 지원 대상이 아니라 경영 대상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상권을 경영 단위로 바라보는 순간, 목표는 매출 증가가 아니라 자산 가치 상승과 지속 가능한 운영 구조로 바뀐다.
SLMO(자립경영체계)는 바로 이 관점 전환에서 시작된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제도보다 구조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유 구조다.
일본의 주요 지역은 대형 디벨로퍼가 도시 공간을 장기 보유하거나, 건물 소유주들이 일정한 결속력을 갖고 있다. 이 구조에서는 지역 전체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한국은 건물 소유가 매우 분산되어 있다. 다가구 건물, 소규모 점포, 다수의 개인 소유주가 혼재되어 있고, 이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어렵다.
또 하나의 차이는 운영 주체다.
한국의 상권은 여전히 상인회 중심 구조가 강하고, 임차인 중심의 의사결정이 많다. 이 구조에서는 장기 투자나 공간 재편 전략이 나오기 어렵다.
결국 일본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형 자립경영체계(SLMO)는 기존 조직을 조금 개선하는 수준으로는 작동하기 어렵다.
상인회에 기능을 추가하거나, 공공사업단을 확대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조직이다.
상권을 전담하고, 책임지고,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독립된 경영 조직이다.
이 조직은 단순한 행정 지원 조직이 아니라,
공간 관리, 브랜드 전략, 데이터 분석, 콘텐츠 기획을 수행하는 전문 운영 조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조직이 사업 단위가 아니라 상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SLMO가 작동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원 구조다.
일본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운영 재원을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다.
건물 소유주 기여금, 공간 운영 수익, 시설 운영 수익이 기본 구조를 이루고, 공공 재정은 보조적 역할을 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공공 예산 중심 구조다.
사업이 시작되면 운영이 되고, 예산이 끝나면 멈춘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자립경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SLMO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민간 기반 재원 구조를 어떻게 단계적으로 만들 것인가다.
초기에는 공공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상권 기여금, 기업 출연금, 공간 수익으로 전환되는 로드맵이 필요하다.
한국형 모델에서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
바로 기업 참여 구조다.
일본은 기업과 지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지만, 한국은 제도적으로 연결 장치가 부족하다.
기업은 CSR과 ESG 전략을 통해 지역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상권 운영과 연결하는 공식 구조가 거의 없다.
SLMO는 이 지점을 해결해야 한다.
기업이 단순 후원이 아니라, 상권의 공동 투자자이자 운영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제 혜택, 평가 인센티브, 브랜드 연계 전략 등 다양한 유인 장치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일본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든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고, 한국의 제도와 시장 환경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소유 구조가 다르면 기여 방식도 달라져야 하고,
재원 구조가 다르면 운영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SLMO는 바로 이 번역 작업의 결과물이다.
상권이 살아나는 것은 이벤트 때문이 아니다.
시설이 좋아져서도 아니다.
누가 책임지고, 어떤 구조로 운영되느냐에 따라 상권의 미래가 결정된다.
SLMO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상권을 장기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제대로 설계될 때, 비로소 한국 상권은 공공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 자립 경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구조를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음 글에서는 ‘왜 기업 자원이 상권 자립의 핵심 동력이 되는가? – 정부 재정 한계의 구조적 분석’을 중심으로, 민간 자본이 상권 운영에 참여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를 보다 깊이 있게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