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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y 21. 2023

선한 죄인, 악한 천사

영화 <어떤 영웅> 리뷰

 

주인공의 윤리적 태도와 부당한 사회적 시스템에 초점을 두는 영화의 리얼리즘적 태도에 유럽에 다르덴 형제가 있다면 아시아에는 아쉬가르 파라디가 있다. 내용이든 스타일이든, 섬세한 직조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인 아쉬가르 파라디는 작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균열과 비극에 집중한다. 영화 <어떤 영웅>(a hero)은 나를 포함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영웅의 상승과 하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교도소 수감자에서 영웅이 된 라힘(아미르 자디디). 행과 불행이 하나의 짝인 세상에서 그의 상승은 오히려 함정이 된다. “사람들이 날 존경해”라는 자기도취는 잠시의 환상이었고 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 추락으로 향하는 현실은 참혹하다.     


 내가 만약 우연히 거액의 돈을 주었다면 단 일 초의 주저함도 없이 주인을 찾으려 할까?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는 윤리적 선(善)에도 불구하고 이 굴러 들어온 행운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시빌과 나데르>도 그렇지만 감독의 작품은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우연과 작은 거짓이 만드는 걷잡을 수 없는혼란을 통해 인간과 사회적 시스템안에 잠재한 양가적 딜렘마에 관해 고민한다.     


 개인을 해친 것도 아니고 사회적 해악을 끼친 것도 아닌데 라힘의 작은 거짓말이 왜 그를 옭아맬까? <어떤 영웅>은 우연히 7개의 금화를 습득하지만 주인에게 돌려주었던 라힘이 한 순간에 영웅으로 추앙되었다가 거짓말쟁이로 추락되는 쓸쓸한 파국의 스토리이다. 그나마 사회적 단절을 선택한 대신 가족적 사랑과 인간주의를 선택한 라힘의 숭고함이 세상의 고난을 견디는 구원의 가능성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추락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결국 <어떤 영웅>은 우리에게  윤리적, 사회적 선의 가치가 얼마나 허술하고 자가당착적이고 배타적인지를 보여준다. 절대적 가치 기준이 모호한 경계에서 이율 배반은 일상이다. 라힘을 이용하다가도 아니면 내쳐버리는 냉정하고 오염된 인간들과 사회를 투영한 거울에 나와 너의 얼굴이 비치기도 한다. 파라디의 영화에서는 누구도 온전하지 않다.   

  

'영웅'(The hero) 만들기     


 교도소를 나온 한 남자가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탄다. 시작부터 의도치 않은 어긋남이 앞으로 전개될 불안을 암시한다. 그가 도착한 거대한 돌산의 공사장. 이란의 고대 유적지를 보수하는 듯한 그 고압적인 돌산의 끝을 향한 카메라 앵글에 파란 하늘이 잡힌다. 공사장의 철책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정글짐처럼 돌산 가장자리를 둘러싼 가설 비계(飛階) 사이에 놓인 나무 계단을 힘겹게 올라 그곳에서 노동을 하는 매형을 만나고는 다시 내려온다. 이 장면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오버랩 된다. 멀리 비행기가 나르는 파란 하늘을 향해 난 녹슨 계단을 올라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내려오던 주인공이 맞았던 고난과 극복, 상승과 하강의 이야기. 오디세우스나 아킬레스처럼 신화적 ‘영웅’(The Hero)이 아닌 비천한 신분의 ‘어떤 영웅’(a hero)은 자신이 익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 <로마>의 가정부 클레오나 자신의 자유를 유보한 대신 말을 더듬는 아들의 존엄함을 지켜낸 부성이 영웅의 조건이 된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20킬로를 감량할 만치 라힘의 캐릭터는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불쌍하고 안스러운 인물이다. 교도소에서 나오면 누나에게 맡겨진 아들 시아바시도 보고 사랑하는 여인 파콘데(사하르 골드스트)도 재회 할 수 있다는 설렘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다. 그러나 간신히 얻어낸 이틀의 귀휴 기간동안 보다 극박한 문제는 채무자인 장인 바르담(모센 타나반데)을 설득해야 한다. 연인이 주운 7개의 금화가 희망이다.     

 

  운명에 없었던 굴러 들어온 행운은 악마의 얼굴을 숨긴 천사의 얼굴일까? 7개의 금화를 팔면 빚의 절반 정도는 갚게 될 것이고 남은 빚은 차차 일하면서 갚을 것이라는 간청을 장인이 들어준다면 교소도를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빛이 보인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라힘의 편이 아니다. 금화의 가치는 한주가 다르게 떨어져 있기도 하고 영수증을 써야 하는 펜도 망가져 금화 팔기를 유보한다. 그때 라힘의 얼굴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 담긴다. 양심의 가책이 드리운 그림자일 것이다. 팔지 않은 채 빨랫감에 쌓여 가방 속에 있던 금화를 우연히 발견한 라힘의 누나는 도둑질을 의심하게 되고 라힘과 가족의 명예를 위해 돌려주기를 권한다. 결국 근처 은행에 들러 주운 금화를 알리고 마침내 주인이 나타나 누나가 보관한 금화를 찾아간다.  

    

   

그러나 금화를 찾아갔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유령 주인의 설정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금화는 주위 사람들과 사회가 주운 횡재가 되기도 하니 모두가 금화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제일 처음 그를 영웅으로 만든 건 교도소장과 직원 타헤리였다. 그들에게 라임의 선행은 수감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교도소의 불미스런 일을 덮기에는 더없는 호재였다. 라힘의 선행이 언론과 tv를 통해 퍼지자 그를 돕고자 자선단체도 나서서 표창장을 수여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후원금을 모으며 톡톡히 단체 홍보의 효과를 얻는다. 가족과 세상 모두가 그를 칭송하는 데 단 한 사람 그의 선행을 의심하고 못마땅해하는 이는 장인이다.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라힘을 미워하는 장인은 채무를 삭감해 달라는 주위의 간청에도 흔들림이 없다. 우연히 주운 남의 것을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데 그게 뭐 칭찬할 일이냐는 그의 냉소적 태도를 비난 할 수 도 없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을까?

   만들어진 영웅인 라힘의 자기도취도 잠시, 추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에게 직업을 약속한 시의회의 행정 사무관은 말만 믿을 수 없으니 금화를 돌려준 증거를 요구하지만 금화를 받고 잠적한 여인을 찾을 길이 없다. 동정이 있을 수 없는 행정 시스템의 원칙을 고수하는 직원의 냉정함은 그가 지켜야 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라힘이 동분서주 하고 거짓이 거짓을 부르는 연쇄적 파장이 그를 궁지로 몰아간다. 그가 위기에 몰리자 교도소장과 직원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거짓 각본을 모두 라힘의 잘못으로 몰아버리고는 그에게 등을 돌린다. 홍보를 노려 라힘을 이용한 자선단체도 후원자들의 후원이 끊길새라 그를 위해 모았던 모금을 불쌍한 모녀를 둔 사형수의 보석금으로 양보하자고 회유한다. 라힘이 받은 도움을 그보다 더 딱한 사형수에게 양보했다는 미담으로 자신들의 실수는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 교활한 각본이다.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애를 써도 등 돌린 세상의 벽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거둔지 오래이다. 다들 제 밥그릇 챙기기가 바쁜 세상이다. 자신을 의심하도록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장인이라고 오해한 라힘이 찾은 곳은 전처인 나자딘(사리나 파르하디)과 함께 운영하는 장인의 인쇄점이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세상을 바꾸었듯이 무한 카피가 가능한 복사기가 세상을 바꾼지는 오래이다. 그러나 종이의 위력은 옛말이고 손바닥만한 액정과 콩알만한 카메라 시선의 복사 위력은 어마무시하다. 그의 거짓과 무능함을 비난하는 장인에게 휘두른 폭력이 전처의 핸드폰과 cctv에도 고스란히 담긴다. 현실은 허우적댈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늪이다. sns를 통해 비행을 퍼뜨리겠다는 협박을 막으려는 라힘의 호소는 아랑곳없이 그의 행위가 찍힌 영상이 퍼진다.     

 

  일찍이 미셀 푸코는 ‘판옵티콘’(panopticon) 이론을 통해 이 서늘한 감시 시선의 폭력을 예언했다. 내가 한 일을, 내가 간 곳을, 나의 관심을 도처에 설치된 cctv와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지켜본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숨겨진 시선에서 피할 수 없는 세상을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그를 칭송한 표창장, 신문, tv화면, 직업소개소의 증거 서류, 불쌍한 아버지를 가슴 아파하는 말더듬이 아들에게 강요되는 동정 어린 원고와 디지털 액정들은 교도소의 감방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사각의 감옥이다. 너의 효용과 쓸모가 내가 선택하고 버리는 잣대이다.    

 

  그러나 감독의 라힘 영웅 만들기는 이제부터이다. 말을 더듬는 아들을 이용해 세상의 동정심을 얻으면 교도소의 체면은 유지되고, 자신의 몫을 다른이에게 양보한 선한 사람을 만들면 자선단체는 여전히 사회적 선을 지켜주는 천사가 된다. 그러나 라힘은 아들의 장애가 이용되어 자신을 구하는 대신 아들의 존엄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진실을 끝까지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영웅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 교도서 직원이 아들에게 회유하며 내미는 원고를 날려버린다. 라힘의 결단이 아버지를 믿고 기다리는 아들 그리고 연인의 사랑을 지켜낸다. 거대한 세상의 배타적 권력과 폭력에 맞서기에는 허약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무정형의 사랑을 보듬는 사람 모두가 세상의 영웅이다.   

  

  재회할 연인에게 보이기 위해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러 나름 한껏 멋을 내고 교도소를 나섰던 라힘이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는 날, 그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가 잘라낸 털의 무게는 미약하나 군더더기 같은 욕망과 치장을 털어낸 가벼움의 무게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교도소로 다시 들어온 마지막 장면, 잠시 재수감을 기다리는 라힘이 교도소 밖으로 석방된 수감자가 기다리던 아내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가 놓쳤던 노란 버스도. 바깥 세상의 아들과 연인 그리고 노란 버스를 향한 교도소의 문은 열린 채이다. 묵묵하게 라힘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일상이 라힘에게 남겨진  희망의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영화는 끝났지만 관객에게 질문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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