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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un 20. 2023

그때 몰랐던 걸 지금은 알 수 있을까?

영화 <애프터썬> 리뷰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면

 한때 사랑했던 것을 잃어도 다시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실을 넘어서는 발견들이 이뤄진다.” 

 - <The beauty of dusk>  프랭크 브루니-    

 

   <애프터썬>은 보지 못하고 놓쳤던 아빠 캘럼(폴 메스칼)의 마음에 가슴 아파하는 31살 한 여성의 쓸쓸한 이야기이다. 그때는 내가 왜 몰랐을까? 그 시절, 캘럼을 붙들고 있었던 위태로운 우울을 말이다. 11살 때 벌겋게 데인 등에 크림을 서로 발라주던 모녀의 추억은 따사하지만 정작 데인 것처럼 아팠던 마음을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애프터썬>이라는 타이틀과 햇빛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부녀의 모습이 담긴 스틸을 보고 상상한 건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심하게 흔들리는 캠코더에 담긴 영상과 단속적으로 끊기는 사이키 섬광 속에서 잘리고 흔들리는 조각들이 어지럽게 엉키는 혼란함에 잠시 아연해 진다. 그러나 곧이어 눈부신 밝은 햇살과 푸른 바다 그리고 알록달록 화사한 색채들이 화면에 펼쳐진다.  

    

  이혼한 아빠 캘럼이 엄마와 살고 있는 소피(프랭키 코리오)와 타르기예에서 짧은 여름을 보낸다. 그런데 이국적이고 눈부신 햇볕이 내리쬐는 그곳에서의 단순한 부녀의 여행기가 관객의 마음에 긴 파장을 남기는 영화의 여운은 무엇일까? 그건 그토록 아팠던 상처를 숨기고 행복한 추억만을 딸에게 남겨주려 했던 캘럼의 사랑이 딱하고 안쓰러워서 일까?  

   

  나중에서야 짐작하게 되지만 여행은 스스로 삶을 끝내고자 마음먹었던 캘럼이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딸에게 행복하고 밝은 기억만 남기려는 안타까운 여정이었다. 햇빛에 데인 피부를 진정시키는 크림이라는 ‘애프터썬’(aftersun). 스크린에는 생명력 넘치는 즐거운 여름 놀이 뒤에 벌게진 등에 서로 크림을 발라주는 장면이 길게 등장한다. 그러나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소피는 그때 찬란한 빛과 웃음으로 빛났던 시절에 읽지 못한 캘럼의 마음에 아파한다. 후회는 아프지만 그 아픔이 즐겁던 시간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몰랐던 캘럼의 아픔을 더듬어 캘럼과 만나게 한다. 비록 쪼가리가 나고 흔들리고 뒤죽박죽이 된 시간과 공간 사이를 헤매지만 그게 재회를 선물한 기억에 대한 대가이다.    

 

  그 시절을 돌아보니 찬란한 햇빛과 눈부신 하늘과 일렁이는 푸른 물 속에서도 상실의 예감이 담겨있었다. 무지개 색깔의 향연같은 밝고 선명한 유채색들과 검고 허연 무채색들 그리고 빛과 어둠이 소피가 되새긴 장면에 혼재한다. 호텔 투숙객을 위한 여흥의 무대에서 흥겹게 ‘마까레나’를 부르는 팀이 입은 옷은 무채색 팬츠에 노란 티셔츠이고 수영장 물 밑에서 장난을 치며 서로를 찍는 캠코더를 두르고 있는 노란색과 노란 색조가 섞인 검은 수쿠버 수트. 그러나 캘럼이 런던에 거주하면 소피의 방은 소원대로 노란색으로 칠해주겠다는 캘럼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가난한 아빠의 마음도 모른 채 언니같은 투숙객이 먼저 떠나며 건내 준 호텔 풀서비스 인증 노란띠를 두른 팔목을 아빠에게 보였던 철없음에 아픈 후회가 인다.    

 

 그때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을 선택할 만큼의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 그 마음을 헤짚는 건 어지롭도록 분절되고 때로 암전으로 끊기는 어둠의 연속이다. 심지어 캘럼의 우아한 태극권이 절규에 가까운 춤이 되고 11살 소녀의 얼굴이 곧 31살 소피의 얼굴이 되어 아주 찰라의 순간에 비친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를 기억의 피로감을 다독이듯 그나마 분명한 건 캘럼이 남긴 캠코더에 남겨진 몇 개의 장면과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카드 한 장 그리고 소피의 발밑에 깔려있는 튀르기예 카페트이다. 다양한 상징과 문양에는 그만큼의 사연이 담겨있다고 그때 상인이 말했었지. 캘럼이 무거운 등을 대고 누웠을 카페트 바닥을 디디고 있는 그소피는 그때 읽지 못한 캘럼의 사연을 더듬는다.      


  <애프터썬>에는 어떻게서든 행복한 추억만을 잔뜩 딸에게 남기려는 캘럼의 마음처럼 다양한 기록 장치가 등장한다. 캠코더, 방수 카메라 그리고 폴라로이드. 그것들은 캘럼에게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볼 딸의 모습이고 등 뒤에 남을 딸 소피가 기억할 행복의 순간들이자 차마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숨겨진 마음의 저장고였다. 그래서 “31살에는 무엇이 되고 싶었어요?”라고 묻는 11살 소피의 질문에 대답 대신 캘럼은 캠코더를 끈다. <애프터썬>에서 질문은 대답을 유보한다. 대답이 얻어지면 질문의 용도는 끝날테니까. 캘럼이 침묵했던 대답을 지금 31살이 된 소피가 찾는다. 그때 몰랐던 캘럼의 마음에 어느 정도는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흘렀다.     

  딸에게 스스로를 지킬 호신술을 가르쳐주고 흡연에 혐오감을 심어주고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주고 등 뒤에 ‘애프터썬’ 크림을 발라주던 손길의 온도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상상 속에서 캘럼은 허름한 호텔 발코니 난간 모서리에 떨어질 듯 올라 서 있고, 버스에 치일 뻔한 걸음으로 다가간 검은 바닷속으로 철벅철벅 걸어 들어가 사라진다. 캘럼의 생일 날 관광객들을 모아 생일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높은 바위위에 서있던 캘럼은 기대했던 웃음 대신에 눈부신 햇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망연히 소피를 내려다 보고 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등 뒤가 캘럼의 모습에 오버랩되고 바로 기억을 툭 잘라버리는 검은 암전. 그리고 호텔 방, 캘럼의 벗은 커다란 등의 근육이 슬픔의 파동을 그리며 소리죽여 서럽게 울고 있었다. 11살 소녀가 한참 성적 호기심에 들떠 다른 투숙객들을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성인 잡지를 넘길 때 그 벽 사이를 넘어 캘럼은 다진 팔의 깁스를 힘겹게 풀다 상처가 흘린 피와 눈물을 흘린다. 천에 얼굴을 덮은 채 질식할 것 같이 아팠던 캘럼의 등 뒤를 이제는 소피가 어루만질 수 있을까? 후회는 늘 뒤늦지만 그럼에도 기억은 사라진 시간으로 되돌아 걸어 들어가게 한다.    

 

  그렇다고 기억의 한계를, 스토리를 형식으로 표현한 난해하고 세련된 미적 스타일이 <애프터썬>의 전부는 아니다. <애프터썬>은 과거를 반성하고 깨달음을 얻은 딸의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여행이 끝나고 소피와 캘럼이 헤어지는 마지막 공항에서의 엔딩 씬이 잠시 또 흔들린다. 그때가 소피가 본 마지막 캘럼의 모습이었다. 즐거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소피에게 미소를 건낸 아빠가 등을 돌려 사라진다. 그리고 캘럼은 캠코더를 끄고 긴 하얀 복도 끝으로 난 검은 문을 열고 사라진다. 어쩌면 <애프터썬>은 떠난 영혼의 아픈 등을 위로하는 슬픈 망부(亡父)의 서사이자 딸에게 행복의 색깔만을 보게하려 애썼던 캘럼에게 보내는 사랑의 헌사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건 슬픈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멀어져도 하늘 아래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캘럼이 눈부신 하늘을 보며 소피에게 말했었다. ‘애프터썬’은 소피에게는 캘럼의 등 뒤 그리고 캘럼에게는 소피의 등 뒤에 발라주었던 사랑의 온도였다. 비록 삶이 꿈과는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네게 숨기고 싶었던 어둠보다 네게 주고 싶었던 사랑과 빛을 기억하라는 등 뒤의 위로. 추억의 한 장면, 어린 소피가 캘럼에게 말한다. 아빠가 “애쓰고 있는 걸 알아요”. 그때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의 모습인 줄을 이제야 어슴프레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   '애프터썬'(aftersun). 해가 졌다고해서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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