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스토리>
한적한 초원 위에 펼쳐진 고요한 자연과 어울리는 오래된 하얀 목조주택이 있다. 이곳에 애틋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산다. 단지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다면 음악을 하는 남편 C는 이 외딴 집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아내 M은 이곳을 떠나 조금 더 현대적인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이 집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를 다그치는 아내에게 C는 선문답처럼 ‘history’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아주 오랜 시간을 안고 있는 이 집의 역사. 결국 M의 주장에 C가 양보하여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고 잠이 든 밤. 피아노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치는 불협화음이 들린다.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불길함의 징조인 듯, 원인을 알 수 없는 피아노의 굉음이 주는 공포의 분위기와 거실의 유리와 벽면을 살짝 싸고 도는 프리즘빛.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오컬트적 유령영화도 아니고 애틋한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도 아니다.
다음 날,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C가 죽게 된다. 그것도 바로 내 집 앞 작은 교차로에서. 집이 안고 있는 ‘역사’를 양보한 C의 희생이다. C는 병원 영안실에서 아내 M이 죽은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고 떠나지만 M은 시트를 그대로 덮어쓰고 일어나 유령이 되어 마치 미풍을 타고 가듯 천천히 집 앞 너른 초원을 가로질서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가 된 아내 M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손을 얹지만 유령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M. 유령은 그저 안타깝게 아내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M은 시간이 흐르자 부쩍 외출이 잦아졌고 마침내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아 이 집을 떠난다. 이 집과 남편과의 역사도 이제 끝이라는 듯 바쁜 걸음으로 아내가 떠난 빈 집을 유령이 남아 배회한다.
아내가 없는 집에 왜 유령은 남아 있을까? 아내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아내는 이사를 할 때마다 이전 살았던 집 벽 모퉁이에 작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고 C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집에 다시 돌아온 적은 없었다고. 어김없이 이 집을 떠날 때도 아내는 집 코너 틈 사이에 작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나 아내가 떠난 뒤, 시트 안에 가려진 손가락으로 메모지를 꺼내려는 유령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과거를 버린 아내를 잊지 못해 이 집에 머무르는 유령의 기다림이 무용한 줄 유령은 알 리 없다.
유령의 사랑도 기다림도 밀려 들어오는 현대의 시간에 의해 서서히 소진되어 간다. 그토록 떠날 수 없는 집이 결국 블도져에 의해 무너져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대신 초고층 오피스 건물이 들어선다. 갈수록 유령이 지키려는 역사가 버틸 곳이 없어진다. 점점 머물 시간과 공간이 지워지고 유령이 지상을 떠나야 할 순간이 임박해오는 것이다. 마침내 C가 M이 남긴 메모지를 꺼내기에 성공하고 메모지를 펼쳐 일별하는 순간, C는 풀썩 주저앉듯 둥그런 모양으로 커다랗게 바닥에 펼쳐진 시트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메모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유령은 메모지를 본 순간 유령의 시간과 어긋난 아내의 시간을 기억해 낸다. 그제서야 지상의 시간과의 이별을 받아들였던 유령은 소멸한다. 그러나 소멸은 끝이 아니라 긴 기다림의 시작이다. 아내도 언젠가는 둥근 시간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