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8살 딸아이와 아내를 버리고 택한 동성애 연인이 죽자 폭식증과 은둔으로 인해 272kg의 흉물스러운 인간 고래가 된 찰리(브렌든 프레이저). 과도비만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으로 지상에서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7일 동안 그는 생(生)이 아닌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가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그저 타락하고 버려진 인간으로 기억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래가 주인공인 <더 웨일>은 그리 쉽게 찰리를 죽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그렇듯 자신이 저지른 죄책감과 상실의 고통을 짊어진 찰리가 감내해야 할 삶의 무거움은 그의 거대한 몸무게보다도 크며 감독의 연민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그에게 구원을 선물한다. 고래가 바다로 비상하는 결말이 다소 식상한 낭만적 비전에 그치는 아쉬움은 접어두기로 한다.
종교적 함의를 빌리자면 죄의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한 7일을 위해 찰리를 살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찰리를 돌보는 이는 리즈(홍 차우)라는 아시아계 간호원이다. 때로 강팍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학 응급실에서 야간에 환자들을 살피고 만성피로에 젖어서도 찰리를 찾아와 돌보는 리즈는 찰리의 가족도 연인도 아니다. 그녀는 찰리가 사랑했던 동성 연인의 여동생이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 아버지로부터 내몰려 몸을 학대하듯 거식(拒食)을 하다 결국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은 오빠의 몸을 수습한 리즈. 그렇게 찰리와 리즈는 아픔과 위로를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 불현듯 나타난 선교자 토마스가 권하는 추상적이고 먼 종교적 구원 대신 이 동지들이 나누는 치유는 속물적이다. 먹고 싶은 한 통의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리즈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잠시의 휴식이 낙담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들을 함께 웃게 한다. 이 모순적인 상황이 그들이 슬픔을 애도하고 이겨내는 묵시적 협약이다.
그런데 이 유대감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리즈는 상태가 위급한 찰리에게 병원 진료를 권하지만 돈 때문에 건강보험을 거부하는 찰리에게 사실은 딸 엘리에게 남겨줄 돈 12만 달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즈의 분노가 폭발한다. “물에 퉁퉁 불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한 것이 나야!”라고 찰리에게 울며 소리 지르는 리즈의 분노는 죽음을 다시 수습해야 하는 타인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찰리의 이기적 마음에 대한 것이었다. 연인이었던 두 명의 시신을 수습하고 홀로 남은 시간을 떠돌게 될 그녀의 생의 무거움이 못내 애처롭다. 신 없는 인간의 구원을 그린 <더 웨일>에서 감독 아로노프스키의 구원은 절룩거리고 공평하지 않다.
이기적 고래인 찰리가 원하는 것은 자포자기한 고래가 아니라 세상에 아름다운 인간을 남겨두고 간 아버지로 기억되는 것이다. 순전히 계산적이긴 했지만 찰리의 연락을 받고 마지못해 방문을 한 엘리는 매번 적의가 가득 찬 냉소적인 말로 찰리를 찔러댄다. 그런 엘리를 단 일주일만이라도 만나기 위해 찰리는 엘리의 에세이를 도와주기로 하고 완성하면 자신이 저축한 돈 12만불을 주기로 한다. 고등학교조차 퇴학의 위기를 일보 직전에 둔 문제아 엘리에게 찰리가 애타게 말한다. “네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서 에세이를 찰리에게 읽어주는 엘리는 자신을 진실로 사랑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눈물을 쏟는다. 너를 이해하는 것이 곧 나를 구원하는 것은 우정뿐만 아니라 부녀의 사랑이기도 하다.
그때 주체하기도 힘든 몸무게 때문에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었던 찰리가 가까스로 일어나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엘리에게 다가가자 거대한 몸과 두 발이 공중으로 뜨기 시작한다. 일주일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문 뒤로는 빛이 눈부신 장면. 결국 찰리를 구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찰리 스스로의 솔직함과 그것을 도운 엘리였다. 관객은 찰리의 신화적 구원에 울지만 그러나 더 큰 것은 눈물겨운 부녀의 서사를 위해 무대 뒤로 물러난 리즈의 사랑과 우정이다.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쓸쓸하지만 리즈에게 슬픈 고래가 바다로 떠난 것만큼의 안도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네가 구원받는 것이 곧 내가 구원받는 역설은 곧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