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Aug 19. 2024

"차근차근 천천히":노부부가 가꾼 집 이야기

<인생 후르츠> 리뷰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차근차근 천천히     

이 문장은 빠알간 작은 모형의 바람개비 비행기가 꽂힌 기다란 장대를  한 노인이 햇빛이 눈부신 하늘로 올리는 시작 장면과 함께 들리는 노배우 키키 기린의 나레이션이다. <인생 후르츠>는 노부부의 일상은 담은 시적 다큐멘터리이다. 꼭 언어로 써야 시가 아니다. 질박한 일상 그리고 잘 끓이고 구워낸 음식, 나의 시간만큼 나이가 담긴 부엌의 투박한 질그릇들과 시간의 무게를 안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집과 가구들. 그리고 척박한 땅에 뿌려져 오랜 세월을 자란 푸르러진 나무들과 과실들, 그 사이로 새와 지렁이가 함께 어울리는 작은 땅을 가꾸는 노부부의 이야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깊은 감동을 주는 시가 된다.  

   

일본 주택 공사 에이스 건축가였던 90세 할아버지 ‘츠바다 슈이치’와 그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 한 ‘최고의 여자친구’ 87세 할버니 ‘츠바다 히데코'. 둘이 합쳐 177살. 이 부부에게 나이듦은 천천히 움직이고 변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이다. 그러기에 삶의 끝자락이라는 부정적 그늘은 커녕 미소가 예쁜 할머니와 때묻지 않은 순진함이 그대로 얼굴에 묻어나오는 할아버지의 일상은 소담스럽다. 영화는 이 노부부가 느리고 정성스럽게 땅을 가꾸는 모습과 그 정성을 먹고 자란 자연의 소리와 색깔을 함께 담아낸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에 맞춰 더불어 사는 자연의 일부이다. 보기에도 기름진 검은 흙을 얻기 위해 커다란 비닐 봉투에 모아둔 낙엽을 정원과 밭에 펼치는 손길이 정성스럽다. 메말라 떨어지는 낙엽은 삶이 다하는게 아니라 땅으로 돌아가 자양분이 되며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땅에서 여문 과실과 채소들은 곧 누군가와 나누는 음식이 된다. 할머니가 말한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돈을 물려줄 수는 없지만 좋은 흙을 물려줄 수는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소를 전해주는 것은 중요하니까”. 천정부지로 비싼 현대식 높은 아파트와 하늘 한번 올려다볼 사이 없이 바삐 시멘트 위를 달리는 분주한 도시의 삶 뒤에 이런 느림과 휴식의 시간이 우리에게도 올까?     


슈이치의 이야기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꿈을 가꾸어 온 한 건축가의 올곧은 여정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해발 0미터였던 고조지 마을이 태풍에 휩쓸려 갔을 때 그는 고지대로 살터를 이전하려는 일본 재택 공사의 고조지 뉴타운 계획팀의 건축가였다. 그러나 마을에 바람이 오가는 길과 계곡, 숲이 둘러싼 자연 친화적인 아파트를 구상한 그의 계획은 싼 토지에 8만 명이 주거하는 메머드급 뉴타운을 계획하려는 공사의 뜻과 어긋난다. 결국 자본주의적 효율성,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깍여 나간 산, 묻혀 버린 계곡의 자리에 성냥갑같이 밀집된 아파트들이 들어서자 그는 자신의 직장을 떠난다.      


비록 실망이 컸겠지만 그래도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그곳의 땅을 300평 매입해 차근차근 천천히 그 땅을 고르고 개간하고 푸르게 가꿔나가며 고조지 뉴타운을 곁에서 지킨다. 변변한 결혼식도 없이 그와 결혼을 한 히데코는 남편의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인 요트를 가지고 싶어했던 남편의낭만적  꿈을 묵묵히 지지할만큼 남편의 뜻을 존중한다. 그것이 전근대적인 여성의 삶이라고 일갈할 수는 없다. 결혼 후, 히테코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할 수 있고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뜻을 인정해주고 응원해준 남편 덕이었다. 남편을 존중하고 잘 보살피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그 행복이 돌아오는 것이 순리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들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들만의 아날로그적 방식이다. 눈부신 햇빛과 빗물 그리고 퇴비를 먹어 기름지게 된 땅에서 나는 열매들과 정성을 담아 만든 음식들을 이웃과 가족에게 나누고 할아버지는 하루 열 통씩 귀여운 그림을 그려 넣은 짧은 사연을 적어 심지어 마트 생선 코너의 직원에게 까지 감사의 엽서를 우체통에 넣어 보낸다. 맛있고 고맙게 잘 먹었다는 사연까지 담아서.  

   


사다리를 오르고 가지에 손을 뻗어 수확한 열매를 넉넉히 나누어 주고 난 뒤에 차려진 그들의 식탁은 오히려 소박하다. 부지런히 정원과 텃밭 그리고 부엌을 드나드는 히데코가 매일 아침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식탁이다. 자신은 구운 토스트에 밭에서 얻은 열매로 졸인 잼을 발라 간단히 아침을 먹지만 밥을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정갈한 아침상을 따로 내어준다. 서로의 다름 때문에 다투는 것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부부의 지혜를 닮기는 어려울까? 모자라는 잠, 분주한 출근 준비로 매일이 정신없는 현실에서 그건 동화 같은 풍경이겠지만 그래도 나와 다른 너를 챙겨주는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는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더욱이 세월의 때가 두껍게 앉은 무쇠 바트를 오븐에 넣어 구워내는 할머니표 쵸코렛 케이크, 푸딩, 간장 찰떡 그리고 텃밭에서 건강하게 자란 죽순 덮밥, 욕심껏 생딸기를 빼곡이 얹어 넣은 수제 케이크까지, 그녀의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선 사랑의 작품이다. 남편의 꿈을 자신의 삶으로 체화하고 승화시켜나가는 할머니의 삶이 반짝인다.     


그렇다고 그들의 동행이 영원할 수는 없다. 어느 장면 할머니는 혹여 자신이 먼저 떠나게 된다면 뒤에 남겨질 남편을 걱정하지만 영화는 제초제를 뿌리고 나서 낮잠에 들었던 슈이치가 세상을 떠난 후의 모습까지 담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터에서  자신의 힘이 할 수 있는 만큼 땅을 가꾸며 집을 지킨다. 남편이 곁에 있듯이 할머니는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매일 아침 영정 앞에 차려 놓고 맛있게 드시라고 말을 건내기도 한다. 부부가 동거동락한 오랜 삶의 역사와 수고가 담긴 이 공간에서 할아버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듯 <인생 후르츠>는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그리는 것 이상을 말한다. 그것은 변해가는 세상에서도 내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살아가려 애쓰고 또 그것이 주위에 어떻게 선한 영향을 남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진솔한 인간의 울림이다. 고조지 민둥산에 어린 도토리 나무를 심어 뒷날 후세들에게 푸른 산을 남겨 주고 ’돈보다 사람‘이라며 숲이 둘러싼 정신 병원의 건축 구상 도면을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내어준 슈이치씨는 나이듦의 품위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선물하고 떠났다. ’차근차근 천천히‘. 느리게 걸어야 세상이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소소한 날들에 보내는 찬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