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Dec 03. 2021

작은 당신이 영웅입니다

영화 <퍼스트 카우> 리뷰



퍼스트 카우(First Cow) : 민초들이 주인공인 서부극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William Blake: Proverb of Heaven)      



 헐리우드 서부극은 만들어진 신화이다. 담배를 한쪽 입가에 물고 무법자 천지의 서부에서 현란한 총솜씨로 악당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했던 영웅은 자신들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대한 미국적 서사의 주인공이었다. <퍼스트 카우>의 감독 켈리 라이카트는 이러한 서부극의 공식을 뒤엎고 소수자인 ‘쿠키’(존 마가로)와 ‘킹 루’(오리온 리) 그리고 자연과 동물들이 공존하고 교감하는 소박한 서부의 이야기와 정경을 찬찬히 들려주고 들여다보게 한다. 더욱이 1.37:1(거의 4:3)의 화면 비율 안에 흐르는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의 움직임과 감성에 집중하게 하며 풍경들은 장엄함보다는 사각거리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이 관객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연주의적인 감독의 시선이 그득한 아름답고 시적인... 그렇지만 슬픈 서부극. 아이러니하다.     


  미니멀리스트이기도 하고 리얼리스트인 라이카트는 아날로그적 화면에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위대한 미국적 역사(신화)에서는 취급되지 않았던 평범한 서부의 삶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대사는 최소한으로 생략되고 마치 맑은 물방울들이 튀는 듯한 음악은 심플하고 영롱한 피아노 선율뿐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들의 언어를 번역 없이 들려주고 마당에는 흙을 파헤치는 개와 뒤뚱거리는 오리가 있고 밤에는 부엉이,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낙엽으로 덮인 질척거리는 땅,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그 위를 떠가는 나룻배, 어딘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인디언 여성들이 등장하는 서부극. 이렇듯 서부 개척사와 미국의 건국 신화를 뒤집는 전복의 서사가 <퍼스트 카우>이다.     


소박한 영웅들

  영화는 현대를 경유해서 과거로 거슬러 간다. 역사를 쓰는 방식이다. 사공이 나룻배 머리맡에 개를 앉히고 노를 저었던 강에는 컨테이너에 물건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지나간다. 그 시절 그토록 풍성하고 짙푸르던 강가 숲의 나무들은 사라져버리고 황량하게 비어있는 마른 땅에 물기 없는 풀들이 듬성듬성 나 있다. 이곳에 여성이 데리고 온 개가 유난히 한 지점의 냄새를 맡으며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의아한 마음에 여성이 두 손으로 그 자리를 헤쳐보니 가지런히 누운 두 구의 유골이 나타난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보통은 이 장면에서 놀라움에 비명을 지르게 되어있는데 이 여성은 아주 조심스레 두 손으로 천천히 흙을 파내어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유골을 관객과 만나게 한다. 역사가가 아니라 여성과 그저 하급 동물에 불과했던 개가 묻혔던 역사를 들춰내고, 영웅이 아니라 보잘 것 없었던 두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시간은 1820년 초기 서부개척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 레이먼드의 단편소설 <The Half-Life>를 각색한 영화 <퍼스트 카우>는 불과 반평생(half-life)의 삶을 마친 어느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1820년대 미국 북서부 오리건 준주가 배경인 이 영화는 모피를 얻기 위한 비버 사냥꾼들의 탐욕과 폭력이 가득했던 초기 서부개척 시대에 소외되고 곤궁했던 두 사람 사이에 피어난 따뜻한 우정을 그린다.  

  비버 사냥꾼들의 요리를 담당하는 유대인인 쿠키의 본명은 오피스 피고위츠이다. 다 헤진 옷과 손싸개로 추위를 견디는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다. 사냥꾼들은 먹을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나자 만만한 쿠키에게 홧풀이용 폭력을 휘두르려 하기 일쑤다. 도망치듯 먹을거리를 찾아 숲속으로 향한 쿠키는 언제 줄행랑을 쳤나 싶게 찬찬히 나무 밑에 난 노란 버섯을 따서 향기를 맡기도 하고 맛도 보며 주워 담는다. 그러다가 몸이 뒤집혀 있는 도마뱀을 보고는 몸을 제대로 뒤집어주어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인 사냥꾼들에게 쫓겨 벌거벗은 채 풀숲에 숨어있던 킹 루를 구해준다. 그리고는 그를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천막에 숨겨 주고 추위에 떠는 몸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준다. 자신을 쫓는 사냥꾼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킹 루는 강으로 뛰어들어 어디론가 도망간다.   

   

  2년 후, 허름한 선술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떠돌이 남자들이 떠난다. 비록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선술집에서 괜한 시비를 걸고 싸움질을 일삼는 사내들의 싸움에서도 총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그저 힘센 자가 이기는 주먹이 무기이다. 그때 홀로 된 쿠키가 한 구석에 앉아 있던 킹 루를 다시 만나게 되고 킹 루는 숲속의 허름한 오두막에 쿠키를 초대한다. 잠시 후 화면에는 오두막 창밖으로 장작을 패는 킹 루가 보이고 뭔가 도와줄 일을 찾던 쿠키는 흙바닥을 쓸고 문턱에서 담요를 털고 어디선가 꺽어온 꽃으로 집을 장식한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역할이 동시에 보이는 화면의 구조적 미학이 빛나는 장면이다. 서로 외톨이였던 두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한 팀이 되는 의미있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마을의 책임자인 영국인 팩터 대장(토비 존스)이 티(tea)에다 넣어 먹을 우유를 얻기 위해 동부에서 암소 한 마리를 데리고 온다. 선술집 사나이들이 비아냥거리며 떠들어 대듯 그 마을에는 애초에 없던 백인처럼 암소도 오리건 준주에는 처음으로 오게 되는 대단한 사건이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훨씬 혈통이 좋은 소는 귀하게 관리가 되고 어느 날 쿠키와 킹 루도 우연히 그 암소를 보게 된다. 우유만 있으면 훨씬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쿠키의 말에 킹 루와 쿠키는 사업 동업자가 된다. 이제 암소의 우유를 훔쳐서 빵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팀웍이 드디어 빛을 낼 때이다. 킹 루가 나무 위에서 망을 보는 사이 쿠키는 암소의 젖을 짠다. 그래도 쿠키는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먼 뱃길을 오는 중에 함께 길을 나섰던 숫소와 송아지를 잃은 암소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이라도 우유를 내어주는 암소에게 “안녕” “어떻게 지내니” 하며 다정다감하게 말을 건낸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과 교감하고 사랑하는 쿠키가 그 시절 서부 어느 작은 개척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총잡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그다.    

 


 쿠키가 만든 발효빵은 대번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어 공급이 수요에 따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 권력자는 권력을 이용해 빵을 먹고 그도 안되는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을 밀어내는 새치기로 혹은 웃돈을 얹어 빵을 먹으려 한다. 권력, 힘, 돈이 여기서도 우선권을 탈취한다. 1820년대 서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이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힘의 논리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가내 수공업. 그들의 도구는 뚜껑 달린 후라이팬과 기름솥 그리고 나뭇가지를 갈라서 만든 반죽 주걱이다. 반죽은 밀가루에 도둑질한 우유를 섞어 넣으면 된다. 누구는 ‘엄마의 맛’이라고 또 누구는 ‘런던의 맛’이라고 하며 비법을 묻지만 킹 루는 레시피는 중국의 비법이라고 둘러댄다. 소문을 들은 팩터 대장(토비 존스)도 직접 와서 맛본 빵맛에 감탄을 한다. 두 남자는 오래지 않아 들통날 불안함과 조급함에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이곳을 떠나리라 생각한다.  일확천금의 욕심일랑 그들에게 없다.     


악당은 죽지 않는다

  만사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그들의 우유 도둑질이 들통나고 마을 권력자의 재산을 훔친 죄의 값은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 자신들을 찾아 나선 팩터와 부하들을 피해 킹 루는 강물에 뛰어들고 도망가던 쿠키는 숲의 높은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에 중상을 입는다. 정신을 잃은 쿠키를 구한 것은 어느 인디언 노파와 여인이다. 그녀들의 집을 빠져나와 쿠키는 숲속을 헤매다 무사히 탈출한 킹 루를 다시 만나게 된다. 킹 루는 다친 쿠키를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발길을 재촉하고 싶지만 부상이 심한 쿠키는 자꾸 뒤처지고 결국 몸을 쉬기에 적당한 야트막하고 기다랗게 구덩이가 나 있는 곳에 몸을 누인다. 킹 루는 쿠키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자신도 쿠키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시 잠을 청하는 킹 루의 표정도 전에 없이 편안하다. 두려워하는 도망자의 기색일랑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객은 이미 첫 장면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결말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특히 죽기에는 건강한 킹 루가 어찌해서 쿠키와 함께 죽어 나란히 누워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행보와 함께 총 한 자루를 메고 숲속 다른 곳에서 걷고 있는 어린 한 청년을 교차로 보여준다. 과연 이 두 남자의 죽음이 그 청년의 총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 서부 개척 시대의 초반. 서부의 역사는 이렇게 죽음의 이유조차 모른 채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혀있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었든 아니면 쿠키처럼 여행자를 위한 작은 호텔을 꿈꾸었든 혹은 킹 루처럼 작은 농장 갖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은 총 한 자루 없이 서부를 헤매다가 행운 따윈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채 반생을 마쳤을 것이다.


 총과 권력이 곧 법인 시절. 권력자의 재산인 암소의 우유를 훔친 죄값치고는 너무도 가혹하고 비극적이다. 노예처럼 부리는 노동자의 저항의 죄값은 권력자가 정한다. 태형이든 사형이든 힘없는 사람들의 생사는 그들에게 달려있다. 죽는 것은 악당이 아니라 힘없는 노예, 떠돌이 민초이며 권력자는 점점 그들의 부를 키워나갔던 노다지 같은 땅이 서부이다.      


그 땅의 역사가 된 두 남자


  유대인 쿠키와 중국인 킹 루는 지금까지 총과 주먹이 난무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서부에서 어디에도 속할데 없이 내쳐지고 도망다니고 배고프던 외톨이 방랑자였다. 그런 그들이 친구가 되어 위기에 처하거나 갈 곳 없는 외톨이가 된 서로를 챙겼던 따뜻한 우정은 지금까지 기댈 곳 없었던 그들의 삶에 든든한 위로와 안식을 주는 거처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장면, 그들은 비록 땅에 누웠지만 그래도 그 척박한 세상에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확신만으로도 그곳은 더없이 따뜻한 집이 된다. 결국 둘은 같이 숲 속 구덩이에 누워 인간의 근원적 집인 땅으로 돌아갔다. 킹 루는 다친 쿠키를 두고 갈 수도 있었지만 끝내 그를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함께 죽게 된다는 비극은 슬픔보다는 끝까지 함께하고 함께 누운 그들의 애잔한 우정에 마음이 아려진다.                     

작가의 이전글 그리움을 담은 '밥'의 풍경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