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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세코이어 길이 오른쪽에 나타나더니 조금씩 멀어집니다. 어느새 담양 근처인 것 같습니다. 4시간 가까이 운전했는데 골프장으로 가는 운전은 설렘으로 피곤함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2월인데, 아무리 남쪽이지만 비가 뿌렸는데도 영상 15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큰 변화 없이 시간이 흐른다면 곧 골프 자체의 양상을 바꿀 지구 온난화. 당장은 따듯해서 겨울 골프를 즐기지만 다음 세대의 골프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안함으로 무거워집니다. 어쩌면 한 여름 한 두 달은 뜨겁고 따가워서 2부는 불가능한 시절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나오네요.
1차선 도로로 빠져 길 양쪽으로 깔끔한 리조트와 호텔들을 지나 비가 막 그쳐 안개로 고즈넉한 담양레이나 CC에 도착했습니다. 알람브라 궁전처럼 오렌지 색을 머금은 유럽풍 클럽하우스 규모가 꽤 큽니다. 전체적인 첫인상은 비 때문인지 차분했고 주변 골프장을 안고 있는 산들이 높지 않았지만 묘하게 깊고 고요했습니다.
레이나(La Reina)는 스페인어로 여왕이란 뜻인데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했고 800년간 아프리카 무어인이 지배했던 지역을 되찾으며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다시 스페인으로 만든 이사벨라 여왕이 떠 올랐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깨지기 전까지 번영하던 스페인의 토대를 만든 여왕이죠. 아 드라마에도 나왔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독보적인 알람브라 궁전이 무어인이 마지막까지 버티다 이사벨라 여왕에게 항복했던 그라나다 지역에 있습니다.
골프는 계절과 날씨, 관리상태가 매일 다른데 티오프 시간까지 고려하면 같은 골프장에서 플레이를 했더라도 매번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와도 매번 다를 수 있죠. 모든 게 정말 잘 맞아떨어졌을 때 천국을 경험 한 골퍼와 거기 별로라는 골퍼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골프장의 평가는 좋았으면 좋았던 대로 나빴으면 나빴던 대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시간을 채워줄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오너의 철학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처럼 토양과 환경에 잘 맞는 잔디인 안양중지를 만들어낸 안양 CC는 삼성이라는 국내 최고의 기업이 소유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오너가 자기 집 마당 정원을 가꾸듯 오너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유별난 찬사를 받는 골프장이 되었습니다.
안양 CC 만큼은 아니지만 담양레이나에서도 오너의 섬세한 마음과 손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티박스 한쪽 축대나 계단을 맷돌로 만든 홀들이 있더군요. 전국에 있는 맷돌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오너의 애정이 없이는 굳이 저렇게 많은 맷돌을 사들여 만드는 노력과 비용은 불가능합니다.
코스 설계자의 초안에는 없었을 작은 연못과 조각정원도 코스 곳곳에 많았습니다. 오너의 손끝에서 태어났으리라 여겨집니다. 클럽하우스 안에 있는 여러 조각과 소품들도 오너가 개인적인 취미로 모은 것을 배치한 것처럼 하나하나 디테일이 훌륭합니다. 설사 인테리어를 꾸미기 위해 한번에 일괄 구매했다고 해도 세심하고 정성을 들여 고른 작품들처럼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전 80년대 유행했던 유럽 궁전을 모방한 것 같은 건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럽풍 궁전은 파리 같은 도시에 있을 때 빛이 납니다. 건물이 주는 문화적인 아름다움은 모양에서도 나오지만 주변과의 어울림 속에서 자연스러워야지 뚱딴지같은 어색함은 정 반대의 효과를 내니까요.
유럽풍이 진하면 진할수록 고유한 문화가 짙고 깊은 한국 어디에 놓아도 뚱딴지같은 느낌이 나기 쉽습니다. 더구나 유럽의 전성기 왕정시대에나 가능했을 돈을 쏟아부어 만든 오리지널에 비해 소재와 디테일에 비할 수 없는 엉성함까지 더해지면 건축자체의 충실함에서부터 심미감은커녕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담양레이나는 달랐습니다. 외부와 내부, 자재와 소재, 디테일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래 이 정도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골프에서 클럽하우스의 역할은 덤(?) 혹은 말 그대로 부수적인 역할에 불과합니다. 잠시 옷을 갈아입는 공간이 화려하고 멋지고 아름다우면 좋지만 그것 자체가 골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클럽하우스의 역할은 골프장의 관리상태나 최초 오프할 때의 사업 방향성 등을 알려주는 등대가 될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등대는 낮에는 잘 보이는 이정표가 될 수 있지만, 작아도 꼭 필요한 불빛만 충분히 비출 수 있는 등대만 있어도 무난한 항해와 접안이 가능합니다. 바다가 검어지면 아무리 크고 훌륭한 등대도 어둠에 먹혀 사라집니다. 오직 그 등대가 비추는 불빛만 남죠. 그 불빛이 얼마나 밝은지 그래서 얼마나 멀리 비추는지가 등대의 목적이고 존재 이유입니다. 등대의 불빛이 꺼져있는 낮에도 등대의 불빛이 얼마나 밝을지 가능해 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등대와 렌즈에 낀 먼지나 얼룩입니다. 부지런하고 충실한 등대지기의 손길은 등대의 불빛을 가늠하는 또 다른 척도입니다.
담양레이나의 클럽하우스가 유럽풍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클럽하우스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건물은 물론 유지관리에서 오너의 손끝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클럽하우스에 쓰는 돈을 줄여 코스와 직원들의 후생복리에 더 투자해서 관리와 운영이 좋아지는 게 골프의 미래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고가 명문 회원제 골프장은 그에 어울리는 그들만의 방식이 필요할 거고요.
딱 한번 가봤지만 믿고 갈 수 있는 골프장 리스트에 담양레이나 CC를 추가했습니다. 전체적인 인상이나 해당 홀 마다 골퍼의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라면 몰라도 홀마다의 레이아웃은 글이나 말로 설명하는 건 한계가 분명합니다. 한번 직접 가서 플레이해 보면 골퍼마다 느끼는 것도 다르고 또 그런 게 골프의 묘미이기도 하니 기술적인 설명은 생략합니다.
담양 레이나 CC의 레이아웃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그린은 덤이었고 골프장의 기본 중의 기본인 관리상태가 훌륭했습니다. 겨울에 이 정도 관리 상태라면 시즌에는 어떨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모든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너의 섬세한 손끝이 여전히 골프장에 닿고 있는 곳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 한 가지. 3년 전쯤 철책으로 맞닿아 있는 군부대 사격장에서 실탄이 날아와 캐디 머리에 맞았던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 모르겠네요. 만약 담양레이나를 방문하시면 프런트에 꼭 물어보세요. 아마 이미 조치를 취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생명과 안전에 관계된 문제니 확인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