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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Apr 29. 2024

의기투합 산행

숙제를 마치듯 얼렁뚱땅

모임이 무산됐다. 예정된 1박 2일의 여행이 누군가는 건강문제로,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집안일로 빠지게 되면서 삼삼회의 만남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미리 약속된 계획이었기에 빼놓은 시간에 공백이 생긴 거다. 그렇다면 이 귀중한 이틀을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딱이다. 지리산행.


내게 지리산은 갓 스물에 겪은 고행의 산행이었다. 등산이 뭔지도 몰랐던 내게 같이 지리산을 가자는 과친구의 제안을 별 뜻 없이 받아들였고, 그렇게 감행한 산행에서 난생처음 엄청 고생을 했다. 당연히 등산화나 배낭이 필수품인 줄 모르고 따라나선 산행에서 가지고 갔던 가방의 끈이 떨어져 짊어지듯 걸어야 했고, 장대비까지 왔다. 과친구는 그때 벌써 등산로가 아닌 지름길로 산행을 하던 베테랑이었으니, 그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것 자체가 유격훈련이 됐다. 텐트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의 천왕봉에 섰을 때 내 몸은 상처에 피로에 절여있었지만, 정상에서 본 운해는 어젯밤까지 내리던 비의 구름을 발 밑에 깔아 저 멀리 산봉우리들을 섬으로 만들어놨다. 장관이었다. 땀이 말라 옷엔 소금기의 하얀 얼룩이 띠를 둘렀어도 장관은 장관 그 자체였다.   


그때의 기억 이후로 산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등산을 할라치면 속에서 뭔가 긴장이 되고 마음을 다져야 했다. 늘 등산은 만만한 일이 아님을. 이번의 공백을 같이 한 친구는 나와는 다른 지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처음 지리산행을 한 나이가 스물이었다. 동아리 단체 산행을 했던가 보다. 막 산행을 시작하려던 그 시점에 비가 왔고, 책임자는 단체가 움직이기에 날씨의 변수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대로 산행을 강행하기엔 부담이었다. 미루었고, 그 친구는 결국 지리산의 밑자락에서 돌아선 산행이 끝내 그의 지리산 미련이 되었던 거다. 그렇게 우리 둘은 의기투합이 되었다. 


30여 년 전의 내 기억과 그의 아쉬움만 가지고 지리산을 오르기엔 체력이 의문이었다. 마음이야 그때처럼 똑같이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가도 좀 더 쉬운 길을 찾게 됐다. 물론 시간적 한계도 있었지만. 중산리에서 셔틀버스 타고 경상남도 환경교육원까지 이동해서 시작하는 산행으로 코스를 잡았다. 약간 얍삽한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때의 기분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이 정도에 타협을 하자.


지리산에 오기 전 친구에게 혹 민폐를 끼칠까 몸 상태를 점검해 뒀다. 충분히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살폈다. 무릎 주변의 슬개골에 통증을 풀어놓고, 발등의 지절간 압통들을 찾아 푼다.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출발 전날 분명 괜찮았던 고관절부위 깊은 곳에 근육긴장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뭉쳐져 있고 아프다. 내일까지 풀릴지 의문이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겠지만, 남은 통증이 찜찜했다. 그렇다고 이걸로 늦출 수는 없지.


전날밤 중산리의 숙소. 지리산 자락에 손에 잡힐 듯 많은 별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별들이 총총하고, 적당한 온도의 봄바람이 맑게 온몸을 감싼다. 이런 상황들에 가끔 온몸이 공기 속에서 하나로 느껴진다. 숨 쉬고 걷는 움직임들이 공기 속의 공간과 같아진다. 아늑하고 아득하다.


이른 아침. 셔틀버스에서 내려 지리산 중턱부터 산행을 한다. 등산 도중에 만난 법계사法界寺. 등산로에 절이 있는 게 아니라, 절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에 의해 등산로가 그어졌을 테지만, 의도하지 않은 계획처럼 절이 있고, 그 절 이름이 하필 법계 즉 법의 경계다. 최근 나의 화두가 이 절의 이름이라니. '법은 경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친구에게 이 말을 하지는 못했다. 아직 나만의 문제요, 어쩌면 영원히 풀어가야 할 문제라서, 섣부르고 설익은 어설픈 정도로 나를 속이고 친구를 속일 수는 없다. 친구는 관심도 없을 화두로 산의 절경을 깰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절의 명칭이 절묘하다.


가능하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산을 오른다. 그래도 날 땀은 나고, 가파른 경사에 다리는 약간씩 무겁다. 한 번씩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엘레지 꽃이 지천이고, 자생 자작나무들이 보이고, 구상나무가 틈틈이 서있다가 키 낮은 관목과 고사목들이 보인다. 해발 고도가 높아진 거다.


저 멀리 계단 끝 어딘가에 천왕봉 표지석이 있는지 사람들이 사진 찍고 서있다. 겨우 정상에 다다랗다는 생각으로 안도감이 들어 반갑지만, 끝이 보이는 이때부터가 힘들다. 늘 그렇듯 목표에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는 순간이 위험한 때다. 막바지 지옥의 계단이요 숨이 깔딱거린다. 옆의 등반객이 한마디 건넨다. 지옥의 계단을 지나면 그다음에야 천국의 계단이 열리지요. 


그 장소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고, 그 자리에 서야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정상에서의 운해는 없었지만, 며칠 전 내린 비로 계곡 물소리는 세찼고, 고인 물은 머문 곳마다 옥빛이다. 몇 십 년 전의 운해가 아직 있으리란 기대가 우스운 일이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정상은 사방 트인 시야에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그때의 내가 섰던 자리에 지금의 내가 다시 섰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지금 이곳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뿐이다. 


등산하다 다치는 경우는 태반이 하산할 때다. 산에 오르면서 다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자신 있다며 빨리 뛰어 내려올 때 크게 다친다. 스틱이 필요한 경우도 내려올 때요, 무릎 보호대도 그렇다. 물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하산을 절반쯤 했을 때 잊고 있던 예의 그 고관절 걱정이 현실화됐다. 돌길이 많아 균형을 잡느라 힘들었는지 다리의 힘이 풀려 조정력이 떨어졌다. 과신전이 일어나기 쉽고, 힘없이 꺾여 다치기 쉽다. 문제점을 좀 더 일찍 발견해 해소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했다. 친구의 도움과 보조로 산행을 마무리했지만, 숙제는 아직 남았다. 


귀가해서 산행을 복기해 본다. 장면들이 하나하나 생생하다. 몸은 뻐근한데 많은 그림들이 스친다. 뭉친 다리를 풀면서 그 풍경들이 눈앞에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 법은 경계가 아니라고 했으나, 경계가 법임을 법계사는 이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걸을 때마다 다리 통증으로 보행이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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