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으로 존재하는
세상의 흐름이 눈에 보였던가 보다. 어떻게 하면 이익이 나는지 알게 되고, 돈의 움직임을 포착하면서 약간의 재미를 본 형은 점점 더 넓은 세상을 본다. 이렇게 세상은 돌아가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그 흐름에 같이 동조하고 싶었다. 마침 시장이 개방되고, 자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여러 나라들의 움직임으로 기회가 열림을 본다. 중개무역 같은 보따리상을 하기도 하고, 약간의 제조 과정을 거쳐 반제품으로 만들어 납품하기도 하고, 유통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여의치 않았던가 보다.
일이란 될 듯 될 듯 안될 때 가장 애가 탄다. 방향이 틀린 것 아니지만 총알이 부족하고 소통에 한계를 자각하기도 했다. 아주 약간의 조금만 더 힘이 있으면 성사될 것 같은 사업은 정상 궤도를 오르기 바로 직전에서 멈추고, 어쩔 수 없는 자금난과 인력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주위의 큰 손에 업체가 고스란히 넘어가는 상황을 몇 번 당하고는 아깝고 아쉬움이 못내 잠을 못 이루게 했던가 보다.
그렇게 홀로 맞서 버티던 형은 어느 날 결단을 내린다. 여기선 더 이상 힘들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라. 먼저 조카를 보내더니 얼마 후 정리를 마치고 떠났다. 그렇게 신대륙으로 가족모두를 데리고 떠난다. 형의 삶이 그러함에 형의 사업이 잘 안 될 때도 또 떠나갈 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은 없었다. 고민 가득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될지 몰라 갈등할 때 가끔 형이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많았지만 형의 부재는 문득 아쉽고 허전함이 남아도 일 바쁜 사람이라 만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단념할 밖에. 내 필요와는 무관한 그의 결정이고 그의 삶이다.
사업을 하는 동안 형은 이제 보인다고, 얼마 안 남았다고, 7부니 8부 능선을 넘었다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엄마에게도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정말 그런가 보다 했다.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 형은 내게 그런 말들이 가족들 걱정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고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 못 한 형의 사정도 이해하지만 굳이 그런 말들이 정말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도시로 이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먼 나라로 낯설고 말설은 그곳에서 꾸역꾸역 살던 형은 그의 간절함과 더불어 기업체의 이사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보낸다. 다행이고 뿌듯함도 얼마. 심장에 무리가 생겨 대수술을 하고 퇴원했다는 는 말 대신 좀 바빴다고 몸이 좀 안 좋았다고 이젠 괜찮고 많이 좋아졌다고 괜한 걱정 말라고 짧은 문자를 보낸다.
10여 년 만의 귀국? 거기서 영주권을 얻었고 시민권은 보류했다고. 몇 주를 보낼 예정이라고, 이 참에 맘껏 얼굴 보자고, 물어볼 것도 몇 있고 근황도 궁금하고. 한 번씩 주고받는 연락으로는 생사 여부 확인 같다. 만나고 손잡기도 하고 밥 같이 먹고 사소한 일들에 동감하고 생각을 얘기하는 등의 일들이 쌓이지 않고 안부차원의 상투적 예의는 빈말 같다. 그래도 그런 대화라도 헛도는 얘기라도 나눌 수 있게 건강했으면 싶다.
드문 형의 방문은 방문이 목적이 아닌 다른 일로 겸사해서 잠시 들른다. 그래서 바쁘다. 그래서 대충거린다. 뭐 그럭저럭 그렇지. 그를 봐야 알 수 있는 얘기도 아닌데 굳이 얼굴은 본다. 의도를 알아도 깊은 말이 젖어들 시간은 부족하다.
어려서 '있음으로 존재하는' 사람이길 바란 적 있다. 별 말없고 할 일없어도 있는 것 자체로 존재감이 있는 그런 존재. 그런 존재가 의미가 있을까 하다가도 그냥 있는 자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의미가 있을 듯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가 보다. 그런 존재만으로 부재의 공허함을 채워주리란 기대였을까. 형의 방문이 무겁다. 수술 후의 약물 부작용에 시달리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형수를 통해 언뜻 들은 듯.
아버지를 보낼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였어도 막상 시간 지나 돌아가신 줄 알면서도 한 번씩 생활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때서야 그립다. 아버지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궁금하고 답답했다. 꼭 그의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어볼 대상의 존재는 그 존재의 있음으로 든든했을 것 같은. 답변보다 스스로 가진 해답의 확인이 더 간절할 뿐.
흐름에 따라가는 것과 흐름에 휩쓸림은 다르다. 형의 심장병을 정신없이 열심히 살아온 자의 뿌듯한 자위라 위안삼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본체를 상하고 허물고서 까지 얻은 이득의 가치로 치환할 수 있을까. 내가 건넬 말들이 그의 일상 변화를 일으킬까. 자신이 없다. 본래 가족과 주변인은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일반이라. 멀리 산속 접근 어려운 점쟁이가 용하다.
알고 있지만 그게 잘 안돼. 무책임하게 들리니다. 쉬운 걸 찾고 있구나. 모르면 몰라도 아는데 행할지 안 할지는 본인만의 몫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게 뭐가 됐든 어쨌든 살아있어야 한다. 오래. 최소한 엄마보다는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