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3부. 느린 마을에 스며들다
4. 보험
“보험을 왜 이렇게 많이 들었지?”
뭐에 홀렸었나 보다. 다시 확인해보니 암 관련 항목만 수십 가지다. 혹시나 암에 걸릴 걸 대비해 진단비부터 치료비까지 골고루 나오게 넣어둔 건데 생각해보니 이걸 뭐하러 이렇게 많이 넣었나 싶다. 가벼운 암이야 그렇다 쳐도 희귀암 같은 건 왜 들었지? 보험을 들기 전에 내가 암에 걸리면 치료를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하지 않나?
주변만 봐도 암에 걸려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요즘은 걸핏하면 암이다. 신기한 건 암 선고받기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들이 암이란 소릴 듣고 나면 시름시름 앓더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방사선 치료를 버티지 못해 죽는다던데 차라리 치료를 받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원인은 암이더라도 죽음을 앞당기는 건 암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암에 대한 과한 두려움이나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이 오히려 사람을 더 빨리 죽게 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보험을 다시 확인한 건 비용 때문이다. 다달이 15만 원을 내다가 매달 나가는 비용에 스트레스받아 이러다 진짜 암에 걸릴 것 같아 보험을 정리하기로 한다.
“엄마, 나 보험 빼려고.”
“뭐? 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도 그런 건 넣어두는 게 좋은데 왜?”
엄마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대비를 철저히 하라고 가르쳤다.
“생각해 봐봐. 내가 암에 걸리잖아? 그러면 내 몸으로 그런 힘든 치료를 견딜 수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그런 생각을 왜 해?”
엄마가 버럭한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봐. 내가 봤을 때 나는 그런 치료 못 견뎌. 그걸 알면서 굳이 암보험 이렇게 많이 넣어둘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엄마는 말이 없다.
“그것도 그렇고 나는 만약에 오래 못 산단 소리 듣잖아? 그러면 가지고 있는 돈 다 들고 차라리 여행 갈래.”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스위스에 꼭 가 봐야지. 거기서 유명한 빨간 기차도 타보고 스핑크스 전망대에 올라 새하얀 산등성이를 보며 스위스산 달콤한 초콜릿도 먹어야지. 여유가 조금 더 있다면 마음에 드는 마을을 골라 며칠은 살아봐야지.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말도 걸어봐야지. 남들은 어떻게 사나 구경도 하고 시시콜콜하게 사는 이야기도 한 번쯤 나눠 봐야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영국에도 가봐야지. 히드로공항에 내려 좋아하는 j.k.롤링의 흔적을 따라 여행도 해보고 해리포터 스튜디오도 방문해 봐야지. 킹스크로스역에도 가보고 패딩턴역에도 가보고 221B 베이커 스트리트도 가봐야지. 혹시나 해외에서 동양인이라고 무시하거나 차별당하면 가슴팍에 숨겨둔 지팡이 꺼내서 “아바다카다브라!” 주문도 외워봐야지.
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오래전에 잠시 살았던 미국에도 가 봐야지. 옛날에 걸어봤던 거리도 걸어보고 유니버셜 스튜디오랑 디즈니랜드도 다시 가 봐야지. 다시 거기에 갈 땐 꼭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 있어야지. 좋은 사람이 생기면 꼭 다시 거길 가야지.
내 꿈은 이런 거다. 직업이나 명예 같은 게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는 경험하고 있을 다른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다. 지금은 현실이라는 게 있으니 당장 할 수는 없는 일들을 '언젠가'라는 이름표를 달아 마음 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죽음을 떠올리면 평생 쌓아두었던 크고 작은 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미래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라서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해도 내 힘으로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미래에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질병에 대비해 보험사에 돈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질병과 사고가 있는데 보험사는 마치 그 모두를 대비해야 할 것처럼 겁을 준다. 죽는 것보다 죽을 병에 걸리면 내야할 치료비를 오늘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마치 미래에 내가 암이라도 걸릴 듯이 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죽고 사는 건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앞두고도 돈 걱정할 걸 멀쩡한 몸으로 잘 살고 있는 오늘 걱정하긴 싫다. 그래서 미리 엄마에게 말한다.
“지금 미뤄둔 거 진짜 마지막인 것 같다 싶으면 그땐 해보고 싶던 거 다 해보게.”
얼마간 말이 없던 엄마는 그러라고 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볼장 다 봤다 싶은 순간이 오면 한번쯤 예상 가능한 뻔한 궤도를 이탈해 계획없이 움직여보자고 다짐한다.
결국 내 고집대로 최소한의 암 항목만 남기고 쓸데없는 항목은 해지한다.
보험 덜고 나니 그나마 속이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