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선

느린 마을 일기 3부. 느린 마을에 스며들다

by 이나

5. 적당한 선


느린 마을에 온 뒤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세상이 많이 변한 만큼 수시로 바뀌는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많이 바뀌었다.

사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갇혔다’였다. 활발한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발전 없이 늙어가는 삶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는 느낌은 강해졌다. 사는 게 맘처럼 안 될 때마다 나는 언젠가 올 멋진 날들을 기다렸다. 이번에 이 고비를 넘으면 앞으로 내게 이보다 큰 아픔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비는 또 왔고 나는 또 비슷한 감정 속에 파묻히길 반복했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잘못을 찾았다. 과거에 저지른 실수와 잘못을 죄다 들추어 나를 질책했다. 지금 이 문제에 봉착하게 된 원인을 뒤적거려 나를 몰아세웠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바로 ‘왜’다.


그때 왜 그랬지?

왜 나는 이렇게밖에 못했지?

왜 나는 그때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나는 그런 쓸데없는 것에 휩쓸렸지?

왜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지?

왜 나는 나를 미워했을까?


한동안 그리 살면서 배운 건 ‘왜’라는 말이 생각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라는 질문은 때에 따라 비난이 된다. 그리고 비난은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원치 않는 상황을 바꾸고 싶으면 ‘왜’보다 ‘어떻게’를 물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차츰 깨달았다.

대학 때 동물의 멸종에 관해 토론했던 적이 있다. “인간이 동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한 동물이 멸종되면 또 다른 동물들이 생겨나겠죠.”라고 답했었다. 그것 또한 자연의 순리라는 뜻이었다.

인간은 자신들이 알고 보고 겪은 것을 토대로 그것이 무작정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동물을 어떻게든 보존하려 하지만 특정한 시기에 환경이 변했고 그 과정에서 환경이 변하기 이전에 살던 동물들이 멸종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탄생할 수 있었다는 걸 잊은 것 같다. 물론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환경이 변하고 우리가 살아갈 터전이 줄어간다는 건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섭리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크게 봤을 때 마땅히 벌어져야 할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같은 시선을 내 삶에도 적용해보면 사는 게 조금 수월해진다. 내가 이 마을에 오게 된 것도, 내가 이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게 된 것도, 내가 이 마을에 오고 나서 꾸준히 운동하게 된 것도, 내가 이 마을에 오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내가 이 마을에 고립되면서 느낀 모든 감정도 다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 일어난 게 된다. 삶을 다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내 삶이 좋다, 나쁘다 단정 짓기 이르다.

발 앞에 선 하나를 긋는다. 나는 한발 물러서서 선 너머를 바라본다. 나는 선도 아니고 선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게 벌어지고 펼쳐지는 선 너머를 나는 그저 볼 뿐이다. 내가 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선 안에 모든 일은 내 일이 된다. 나쁜 일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 고통스러운 일을 보면 고통스럽다. 좋은 일이 벌어지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낀다. 온갖 사건과 감정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언제는 좋다가 언제는 안 좋다. 좋을 땐 들뜨고 안 좋을 땐 가라앉는다. 본래 이게 삶이구나, 아는 순간 나는 선 밖으로 나가 있다.

선 안에 있으면 괴로움도 고통도 다 내 것이 되지만 밖에 있으면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건 그것이고 나는 나다. 나는 tv 속 내가 나오는 생생한 드라마를 보듯이 그것들을 지켜본다. 누가 내게 뭐라든지 화낼 필요가 없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냥 tv에서 보여주는 것들을 재미있게 즐기면 된다.

그저 벌어질 일이 벌어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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