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은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들을 귀먹게 하며, 오미는 사람들을 입맛을 상하게 한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들을 미쳐 날뛰게 하며,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들 행동을 거리끼게 한다.
是以聖人爲腹不爲目.
이로써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 이로써 성인은 무한한 상상을 중히 여기고 깊은 통찰을 구하지, 섣부른 감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제12장)
去彼取此의 彼(저것)은 오색, 오음을 말하고, 此(이것)은 오색과 오음 너머의 무명을 말한다. 3장의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에도 그대로 대입하면 버려야 할 '저것'은 虛其心과 弱其志이며 취해야 할 '이것'은 實其腹과 强其骨이 된다. 모두가 우러러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오색, 오음을 쫒지 말고 나와 내 주변의 보잘것없지만 소소한 것(무명)에 마음을 두라는 말이다.
그네 타는 로봇
그네 타는 로봇이 어떻게 학습하는지를 살펴보면 원래의 보통의 개발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하면 사람이 그네를 어떻게 타는지를 먼저 관찰하든지 경험적으로 내가 어떻게 그네를 탔나 스포츠 선수들은 어떻게 타나 이런 거를 본 다음 플로우차트, 프로그래밍 방식으로 코딩해서 정확하게 컴퓨터한테 시킨다. 이 정도는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봉이 흔들리고 바람이 부는 조건이 주어지면 개발자는 프로그래밍을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이 로봇에게 알파고, 알파스타와 같이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으로 강화학습을 시키면 가중치를 찾아가면서 스스로 코딩한다. 이때 얼마나 무식한 과정을 통해서 가중치를 찾아가는지를 보고 있자면 AI가 어떻게 학습하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그게 되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로봇은 그네가 뒤로 가장 높이 올라가서 내려올 때 무릎을 살짝 굽혀서 굴려주면 앞으로 더 높이 올라간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다리를 벌벌 떨기만 하고 앞뒤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을 지나야 겨우 앞뒤로 흔들리는 정도로 발전한다. 좀 더 지나니 사람과 약간 비슷한 동작을 보이면서 전보다 훨씬 많이 흔들린다. 그런데 좀 더 놔뒀더니 사람과는 좀 다르게 그네를 타는데 사람보다 잘 탄다. 왜 그런가를 자세히 봤더니 앞에서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혀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봇에게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더 높이 올라가면 바로바로 보상만 해준 것 말고는 없다. 이 보상만 알고리즘으로 넣어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네를 잘 타는 방법을 이 로봇이 스스로 터득해서 알아낸 것이다.
인간은 생후 3년 안에 기본적인 신경망이 완성되고 이때 얻어진 신경망을 평생 밑천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래서 어릴 때는 뭘 가르치기보다 실제 보고 듣고 몸소 겪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감수성을 키우는 데 유리하다. 이 감수성은 그네 타는 로봇처럼 알고리즘이 단순할수록 훨씬 넓고 깊게 확장된다. 즉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그냥 보고 듣고 몸소 겪어 보게 해야 뭘 알아챌 것인지 알고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오색(五色), 오음(五音)을 가르치기보다 색(色)과 음(音)을 몸소 겪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색(五色), 오음(五音)을 가르치면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흥미로운 동물 실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여운 새끼 고양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라면서 매우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새끼 고양이들을 생후 다섯 달이 될 때까지 캄캄한 방에 가두어 두고 하루에 한 번씩 방에서 꺼내 절반은 가로줄이 그으져 있는 원통에 넣고 나머지 절반은 세로줄이 그어진 원통에 넣는다. 원통 속 고양이들은 모서리가 전혀 없는 환경에 높낮이와 원근을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에 놓여 있다. 자기 몸뚱이마저 볼 수 없다. 시야를 가리는 널찍한 검은색 원형 판을 목에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세로줄 무늬에 있던 녀석을 가로줄이 그어진 원통에 넣고 나서 가로줄을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더니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 녀석은 가로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오색만 보고 자란 사람은 오색 사이의 색은 보지 못한다.
세로줄무늬만 보고 자란 고양이는 가로줄무늬 바닥이 보이지 않으므로(끝이 없는 어둠으로 느껴진다) 뛰어내릴 수가 없다(좌) 세로줄무늬만 보고 자란 고양이는 쉽게 뛰어내린다(우)
새끼 고양이 실험과 그네 타는 로봇이 학습하는 방식은 인간에게 '무위의 통치'가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직 '무위'만이 오색(五色), 오음(五音) 너머에 있는 무명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통치자가 백성들의 삶에 간섭할 때는 생선을 지지듯이 인색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