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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Apr 13. 2024

개방적인 유럽

동아시아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 2

絶聖棄智(절성기지) :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民利百倍(민리백배) : 백성들의 이로움이 백배가 된다.

絶仁棄義(절인기의) :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民復孝慈(민복효자) : 백성들이 효성과 자애로움을 회복할 것이다.

絶巧棄利(절교기리) : 기교를 끊고 이해관계를 버리면

盜賊無有(도적무유) : 도둑이 없어진다.

此三者以爲文不足(차삼자이위문불족) : 이 세 가지는 글로써 충분하지 않다.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 그러므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見素抱樸(견소포박) : 소박하게 살고

少私寡欲(소사과욕) :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라.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왜 서유럽이 다른 지역의 유라시아 문명보다 지배적인 식민지 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은 산이나 강 특히 지중해의 복잡한 해안선에 의해 나누어진 작은 국가들이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직접적인 이웃에 의해 야기되는 위협들은 경제 및 기술 발전을 억압한 정부들이 그들의 실수를 곧 바로잡게 하거나 상대적으로 빠르게 경쟁하는 것을 보장해 주어 그 지역의 주도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항상 바뀌었다. 즉 소국적이고 분열적이며 개방적인 '열국(列國)'에 맞는 지형을 갖췄다.

  반면 다른 문명은 대국적이고 단일적이며 고립된 '제국(帝國)'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지리, 지형을 갖고 있는 지역에서 발전했다. 이러한 제국의 건설자에게 있어 그들이 느끼는 직접적인 위협은 끝없이 확장된 영토 너머에 있는 먼 변방의 이웃나라가 아닌 내부의 정적이 더 크게 다가오는 형국이다. 중국의 경우 주변 이민족의 침략으로 통일제국이 들어서면 국경 너머의 이웃나라 보다 제국 안의 분열적 세력을 더 경계하였고, 다시 한족의 반란으로 이민족 정권을 몰아내도 결국에는 국경 바깥 보다 제국 안의 동요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정확한 지적이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국가는 고대부터 항시 이웃 도시국가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와의 패권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부의 기술 발전을 독려해야 했고 이를 위해 외부와의 인적, 문화적 교류도 개방적이어야 했다.


  과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온 피난민들이 갯벌을 간척해 만든 도시였다. 118개의 섬과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공화국 베네치아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중세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의 주요 활동은 상업이었고 그들은 항상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베네치아의 부는 상업을 통해서 축적되었다. 베네치아의 조선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아르세날레 조선소에서 만든 선박을 타고 지중해는 물론 멀리 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자원이라고는 소금과 생선뿐이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방에서 향신료와 비단, 도자기를 들여와 유럽 시장에 비싼 값에 팔았다.

  베네치아 번영의 원동력은 정치, 사회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베네치아의 최고 통치자였던 도제(Doge)는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권력 또한 제한되어 있었다. 도제의 의사 결정은 언제나 대평의회가 견제하였다. 대평의회는 베네치아 정치의 핵심적인 조직이었다. 400명이 넘는 의회는 매년 공정한 절차를 통해 구성원 100명을 교체했다. 비록 귀족 중심으로 꾸려져 있지만, 의원직의 세습은 불가능했고 상인 출신의 평민들도 의원이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분 상승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포용적 정치와 자유로운 분위기는 경제 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베네치아에는 이른바 코멘다(Commenda)라는 독특한 계약 제도가 존재했다. 재력이 없는 상인들도 귀족이나 부유층의 투자를 이끌어내 원거리 무역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벤처 계약. 투자자들은 위험 부담을 안는 대신 일정한 수익을 보장받았다. 투자자들은 상인들이 이집트, 시리아 등 먼 곳에 가서 무역하기를 원했다.

  코멘다를 통해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고 귀족과 상인이 함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간척지에서 시작된 도시는 그 위상을 더 확장해 갔다. 13C 베네치아의 영토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 키프로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계속될 줄 알았던 베네치아의 번영은 귀족들이 대평의회 의원 선출 방식을 전격적으로 개정하면서 막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세습금지원칙을 깨고 아들과 손자에게 의원직을 대물림하면서 평민들의 대평의회 진입을 봉쇄한다. 신흥 세력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귀족들이 기득권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대평의회를 장악한 귀족들은 이어 황금의 책이라는 귀족 명부를 작성한다. 이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가문은 더 이상 대평의회에 참가할 수 없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있던 베네치아는 폐쇄적인 사회로 역행하고 있었다. 기득권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경제적 번영을 희생한다. 이후 베네치아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결국 코멘다 제도까지 철폐되면서 베네치아는 몰락한다. 베네치아의 경제가 쇠락하면서 탐욕스러운 기득권도 함께 몰락한다. 신대륙 발견으로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 갔지만 베네치아는 더 이상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역의 주도권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넘어가고 만다.

  베네치아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지배권력이 탐욕을 드러내어 기득권이 되는 순간 사람들의 돈벌이는 예전만 못하게 된다. 상인들은 돈벌이가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경제적 번영은 곧 막을 내리고 기득권도 함께 몰락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이웃 나라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유럽은 늘 혁신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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