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라지는 절차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 감독 박찬욱

by 데미안에너지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영화를 먼저 감상한 후 리뷰를 읽어 주세요!

-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

사후 합리화 VS 사전 합리화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은 벌어진 일을 정리하는 말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사고로 봉합하여 작은 일로 합리화한다. 일단 끝난 일이니 잊어야 한다거나 지나가는 방식으로 책임을 덜기 위한 해석이다.

반면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앞으로 할 일을 합리화한다. 설명을 멈추고 미래를 밀어붙인다.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준비를 계획하는 문장이다. 영화에서 잔혹함은 표면이고 공포는 언어가 행동의 선행조건이 되는 구조에 있다. 정교한 악의 설계는 보이지 않고 단순한 문장이 행위를 가능으로 바꾸는 절차가 남는다.

영화는 현대인이 각자 어떤 문장으로 과거를 축소하며 살아왔는지, 어떤 문장으로 미래를 위한 합리화를 진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얼핏 보면 유치해 보일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기존 작품들이 치밀함과 정교함으로 구조를 설계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축소와 단순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어설픈 행동을 유발하는 방식에 서늘함이 있다.

-

집은 사랑이 아니라 해결 방식을 보관하는 장소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만수의 집이다. 만수에게 집은 기억이나 추억이 아니라 촉매제다. 집을 잃는다는 것은 물건을 잃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지탱해 온 결정 방식이 흔들리는 일이다.

첫 장면에서 만수는 자신감이 넘치고 모든 것을 이룬 표정을 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만수가 아니라 아내 미리의 표정이 바뀌어 있다. 만수는 결정을 수행하는 방식이 달라졌고 자기의 결정에 만족한 표정이지만 아내 미리는 더 이상 만수를 믿을 수 없다. 미리의 방식은 만수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만수는 미리의 달라진 내면을 알아채지 못한다.

영화에서 집은 현재를 지켜주지 않는다. 만수에게 집은 결정을 보관하는 저장소다.

영화에서 만수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폭력(권총)이다. 그 아버지도 베트남 전쟁에 가게 된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지만 만수는 그 폭력을 사유 없이 그대로 계승한다.

만수는 가족을 비밀의 공유(은폐)로 묶었다. 이때 친밀감은 범죄의 안정성을 높인다. 가족은 보호가 아니라 범죄가 지속되도록 돕는 운영 조직이 된다. 아들과 친해지는 계기도 아들의 죄를 숨겨주는 것이고, 미리는 고시조의 시체를 새끼 돼지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감싸는 행위가 보호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유지할 때 가족은 조직과 구조가 된다. 사랑의 증거가 대화와 믿음이 아니라 비밀의 공유와 효율이라면, 태양 제지나 문 제지와 다를 게 없다. 여기서 “어쩔 수가 없다”는 가족 내부의 사전 합리화를 강화한다.

-

말은 의미가 아니라 기능이다

“어쩔 수가 없다”는 감정이나 변명이 아니라 기능이다. 주체를 지우고 의도를 누르고 책임을 줄여 행동 가능성을 높이는 문장이다. 만수가 반복해서 주입하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 먼저 길을 열고 행동이 따라간다.

만수가 양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내 미리가 집을 내놓는 순간 만수 안에서는 폭력의 스위치가 켜진 상태였다. 만수가 사건을 바라보는 평면성이 오히려 공포로 다가온다. 복잡한 내면이 요구되지 않는 세계, 사유가 아니라 절차가 사람을 대신하는 세계.

그래서 나는 만수의 치통을 양심으로 볼 수 없었다. 작동을 방해하는 오류 신호로 읽었다. 공장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만수의 치통은 윤리가 아니라 작동을 위한 조정이다.

-

속도는 윤리를 건너뛴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제거해 가는 과정은 속도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보다 ‘어떻게’다. 밤에도 일하는 기계의 속도, 반복과 단순화, 수면의 삭제, 관계의 삭제, 온기의 삭제가 “어쩔 수가 없다”는 말 속에서 윤리를 건너뛴다. 그리고 만수의 감각이 제거된다.

멈출 수 없는 게 아니라 멈추는 기능이 비용으로 계산되는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 망설임은 지연이며 결함이 된다. 영화는 만수 주변에 남아 있는 온기를 모두 제거하고 기계가 되어버린 만수의 모습을 살해의 속도로 보여준다.

선출도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모은다. 이 사실은 도덕적 대비를 무너뜨린다. 이 영화에서 선악 구도는 부차적이다. 중심은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자동화하느냐에 있다. 만수는 문제 해결 방식에서 생기는 마찰을 제거해 작동만 남긴다. 불법이 문법으로 자리 잡은 만수는 살해 속도와 행동이 기계처럼 정교화되는 것이다.

-

인간의 형식이 바뀐 것


태양 제지에서 만수는 온기와 감각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손끝과 리듬, 판단과 숙련이 자산이었다. 그러나 문 제지로 옮겨가며 빛을 잃고 어두워진다. 문 제지에서 온기는 잡음이 되고, 따뜻함은 결함이 된다. 직장이 바뀐 게 아니라 요구되는 인간의 형식이 바뀐 것이다.

경쟁자들을 차례대로 살해하는 과정은 인간적 요소를 삭제하는 작동 모드였다. 그 삭제가 누적될수록 만수는 망설임이 사라진 기계에 가까워진다.

만수의 치통은 아직 멈출 수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수는 그 기능을 스스로 꺼버린다. 만수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고 더 빨리 기계가 되는 속도를 선택한다. 인간성의 마지막 선을 영화 초반부터 넘어선 만수처럼 성공이 인간성을 남기지 않는 사회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양심과 죄책감을 정지시킨다.

-

사람은 어디에서 사라지는가

이 영화는 ‘인간이 기계를 두려워한다’나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기계가 되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는, 기계가 되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문제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유치함?은 치밀함이 불필요해진 세계의 표정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내면을 설명할 시간에, 문장이 절차와 사람을 대신한 것이다.

절차나 규칙은 친절하게도 다음 단계를 알려준다. 우리는 그 안내를 따라가며 스스로를 조정한다.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가 더 잘 작동하도록 고쳐진다. 그때 우리가 잃는 것은 멈출 권리다. 어디에서 멈춰야 하고 멈출 수 있는지 스스로 감지해 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감각이 조용히 삭제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질문을 영화가 남기고 있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감독 #한국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