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반느》 리뷰 | 감독 이종필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영화를 먼저 관람한 후 리뷰를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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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청춘을 위한 위로나 따뜻함으로 느끼지 못했다. 더 슬프고 아팠고 여운이 오래 남았다. 다만 이 영화가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 관객이 인물들의 상처를 알아가는 속도만큼 내면이 움직이게 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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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의 제목(『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은 애도의 방향을 먼저 걸어 둔다. ‘죽은 왕녀’라는 말이 이미 부재를 전제하고, 독자는 그 전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은 다르다. ‘파반느(Pavane, 느리고 위엄 있는 2박자 혹은 4박자의 춤곡)’라는 단어는 죽음의 명사보다 리듬과 시간, 느린 춤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 제목을 보는 순간, 이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리기보다 상처가 남은 채로도 삶이 계속되는 방식, 느리게 회복되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방식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 기대는 꽤 설득력 있게 쌓인다. 세 사람의 관계 형성은 상처를 설명하지 않고, 침묵과 기다림으로 온기를 전달한다. 유토피아백화점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세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나간다. 관계는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셋의 연결로 흘러간다. 지하 깊은 곳에서 빛을 향해 나오는 세 사람은 삼각형의 꼭지점이다. 누구 하나가 빠지면 삼각형은 무너진다.
관객은 어떤 교훈을 안내받는 게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감정은 그 뒤를 따라온다. 세 사람을 관찰하게 만드는 시간의 누적이 관객의 감정에 스며들게 연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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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를 보면서 나는 잘못된 어른들의 그림자가 세 사람 위에 드리워져 있다고 느꼈다. 세 사람의 상처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원인은 바깥에 있는데, 결과는 세 사람이 각자 책임져야 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사랑받고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했던 기본 안전망이 무너진 어린 시절을 끌어안고 살아가지만, 세 사람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빛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기성세대가 만든 무책임과 방치, 틀 같은 것이 세 사람의 삶 전체에 빛을 가리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화 제목이 《파반느》라는 사실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가볍게 달려드는 춤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몸의 균형’을 다시 찾는 동작처럼 느리게 이어져야 한다고, 영화는 초반부에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죽음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 영화가 쌓아온 리듬이 다른 형태로 고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려운 시간을 거쳐 경록이 미정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갈 때 빛이 나는 경록의 얼굴이 잡힌다. 영화는 그 얼굴을 빛처럼 선명하게 찍어 관객의 기억 속에 남긴다. 이때의 빛은 생활 속에서 이어질 빛보다는 훗날 ‘기억 속의 빛’으로 남을 준비를 하는 빛에 가깝다.
상처는 느리게 추는 춤처럼 천천히 회복되니까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영화였어도 좋았을 텐데. 살아줘서 고맙다, 네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영화였으면 어땠을까. 경록의 삶이 멈춰 선 이후, 미정과 요한은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앞날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록이 ‘남겨진 이들을 움직이는 힘’으로 남는 방식이 내게는 가장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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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록의 삶은 외부 원인으로 엇나가지만, 경록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는 사람이었다. 상처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는 선택을 반복해 온 결과가 경록의 삶이다. 경록은 자기 안의 기준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그래서 경록의 존재는 미정과 요한을 변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셋은 서로에게 각자의 빛이 된다. 정확히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따뜻하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경록이가 흔들리며 살아갈 권리가 멈춰버린 지점부터, 경록은 미정과 요한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삶에서 뒤로 멀리 밀려나 버린 것이다. 요한의 소설과 미정의 추억 속에서만 살아가는 경록의 삶이 안타깝고 미안하고 아리다.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던 경록은 요한과 미정에게 오로라 같은 빛이 되었다. 오로라는 잡히지 않는 빛이고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오로라를 보는 사람에게는 기억만 남는다. 영화에서 경록의 삶이 멈춘 뒤, 경록의 청춘은 오로라처럼 선명하게 고정된다.
영화는 경록을 잃은 뒤 남은 두 사람이 삶에서 성장하고, 경록의 영혼을 동행으로 느끼게 만들어 상실의 무게를 줄이려고 한다. 그 선택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위로가 가능한 만큼, 경록이 살아서 흔들릴 시간이 함께 사라진 것은 못내 아쉽다. 경록의 인생 자체가 나에게는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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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록, 미정, 요한.
세 사람의 빛은 서로에게서 시작됐지만 끝에서 그 빛은 한 사람의 부재를 중심으로 굳어진다. 나는 그 지점이 위로보다 더 큰 슬픔으로 남았다. 오로라처럼―아름답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빛으로, 청춘으로.
‘파반느’라는 제목이라면 경록에게도 흔들리면서 살아갈 시간을 허락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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